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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아시안게임 '신데렐라' 임춘애(林春愛), 88 올림픽 성화봉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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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그리 정신, 어? 현정화 봐바. 걔도 라면만 먹고도 달리기에서 금메달 세 개나 땄잖아."

 

"임춘애입니다. 형님." -영화 '넘버 3' 대사 중-


‘라면 소녀’로 알려진 육상선수 임춘애(林春愛)는 1969년 7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은행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나주.

 


 

그녀는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800m, 1500m와 3000m 경기에서 3관왕을 차지해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같은 대회에서 3관왕을 쓴 유일한 선수이다.

 

처음에 임춘애는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의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해서 국가대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선발전 이후에 치뤄진 전국체전의 3000m 종목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좋은 성적을 기록하자, 임춘애를 국가대표로 선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고 뒤늦게나마 국가대표에 합류하게 되었다.

 

국가대표로 깜짝 발탁된 임춘애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 육상 선수 영웅으로 우뚝 서게 된다.

 

임춘애는 3,000m 경기에서 중국 선수에게 개인 최고 기록에서 10초 이상 뒤진 기록이었지만 중국 선수가 주춤하고 임춘애는 포텐이 터지며 금메달을 땄다.

 

 

 

 


 또한 800m에서는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는데 앞서 들어온 인도 선수가 파울로 실격당해 임춘애가 우승했다.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아시안게임 3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임춘애를 열광했다. 금메달을 3개나 따서기보다는 집이 가난하여 라면만 먹고 고된 훈련을 견디며 마침내 금메달을 목에 건 인간승리 스토리에 국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했다.

 
가난해도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인생 역전 스토리는 우리 국민들의 묘한 정서를 파고 들었고 또한 당시 전두환 정부는 이러한 ‘영웅’을 원했던 것이다.

 



 과연 임춘애는 라면만 먹고 뛰었을까...

 
당시 언론은 “그녀는 삼시 세 끼, 라면만 먹고 86 아시안 게임 중장거리 육상 3관왕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에서 하니 언니는 울지 않기 위해서 " 달리면서 웃는다 "고 했다. 임춘애는 실사판 ‘하니 언니'였다.

 

임춘애의 어린 시절 집 안 자체가 넉넉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선수로 뛰기 시작하면서 장학금을 받으면서 운동을 하여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금메달을 딴 후 임춘애 학교의 육상부 코치였던 김번일이 언론 인터뷰에서 육상부의 열악한 환경을 이야기했다. 육상부에 지원이 부족해서 간식으로 라면만 먹는다는 식으로 기자에게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기자가 이를 왜곡해서 임춘애를 비롯한 육상부 선수들이 '라면만 먹고 운동한다'고 기사를 쓴 것이 사실처럼 전달된 것이다.

 

 

임춘애 본인도 여기에 대해 해명을 했다.

"라면 이야기는 제가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저를 발굴하고 길러주신 김번일 코치 선생님이 하신 인터뷰에서 열악한 학교 육상부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선수들이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

 



조금 환경이 좋은 학교는 우유도 지원된다'고 말씀하신 것인데 '임춘애가 17년간 라면만 먹고 뛰었다''우유 먹는 아이들이 부러웠어요'라고 쓰는 바람에 이후 제가 '라면 소녀'로 불리고 '헝그리 정신'의 대명사처럼 된 것이죠.

 

당시 체력보강을 위해서 도가니탕과 삼계탕은 물론 뱀탕까지 먹었는데 라면만 먹고 어떻게 뛰겠어요."

 


후에 그 기자가 왜 그런 왜곡 기사를 작성 했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도 열악한 육상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좀 더 후원을 많이 받게 해주려고 인터뷰 내용을 심하게 과장해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당시 큰 대회를 앞두고 사람들은 영웅을 원했고, 그것이 가난을 극복한 스토리였기에 사람들은 라면 소녀에 열광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는 일제식민지 시대의 패배 의식과 전쟁의 상처와 절대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신 무장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임춘애의 ‘라면 소녀’는 '하면 된다' 라는 신화가 빚어낸 하나의 촌극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

 

어쨌든 임춘애가 86 아시안게임에서 획득한 금메달 3관왕은 어느 누구도 쉽게 이룰 수 없는 영웅의 기록이다.

 

다른 종목보다 특히 육상에서의 세계의 벽은 정말 에베레스트만큼 높은 벽이다. 2015년 현재에도 육상의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기록경기 어느 종목을 봐도 한국 기록은 (아시아 기록을 보더라도) 세계 기록과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난다.

 

우리나라는 마라톤에서 성과를 낸 것 말고는 육상에서 상위권에 들어 간 것을 찾기도 힘든 수준이다. 이는 헝그리 정신으로 극복할만한 것이 결코 아니다.

 

임춘애는 당시 학대나 다름없는 비과학적 훈련과 오로지 근성으로 버티며 '여고생'에 불과했던 그녀가 아시안 게임이라는 세계무대에서 금메달을 3개씩이나 땄다는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큰 영광을 안겨 주었다.

 


임춘애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성화 최종 주자가 되었다. 경기장에 마지막 도입 주자였던 손기정에게 성화를 받아서 경기장을 한 바퀴 돈 다음 3명의 최종 점화자에게 성화를 전달했다.



이후 그녀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로 은퇴하고 완전히 육상계를 떠나게 되며, 임춘애는 축구선수 출신의 '이상용'씨와 결혼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다.


대한민국 육상 선수 임춘애는 금메달 3관왕만큼이나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출처 : 영남신문(http://www.ynam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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