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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바둑기사 이창호. 돌부처 이창호. 바둑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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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기사이며, 프로 九단이다.[5] 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6년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다.

2. 바둑의 신

대단한 기록임에 틀림없지만 승률만 놓고 봤을 때 역시 대단한 건 이세돌과 최철한. 괜히 이 두 사람이 포스트 이창호가 아니다. 참고로 2019년 11월 기준 이창호 - 이세돌 상대전적은 이창호가 36승 34패로 2판 더 많이 이겼다. 이세돌이 2019년 11월 19일 프로기사직을 은퇴하여 영원히 바뀔 수 없게 됐다.

조훈현-이창호의 10년 사제대결(1)
교체되지 않는 권력, 이창호
역대 인류 최고의 기사는 ‘돌부처’ 이창호



2016년 3월 기준 바둑기사 통산전적 레이팅 순위. 1분 58초부터.

1990년 11월 초순부터 2006년 3월 중순까지 16년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가공할 지배력은 바둑 역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 전세계의 모든 바둑기사가 그의 기보를 붙잡고 파훼법을 찾아 헤맸지만 그렇게 그는 16년간 세계 정상을 지킨 것이다.

현 시점 이창호는 세계 최강의 기사가 아니지만 바둑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끝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며 현대바둑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업적으로는 오청원에 비견되는 선지자였으며, 뛰어난 천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무수한 연구와 새로운 정석이 난무하던 현대 바둑의 백가쟁명 속에서 오로지 그 홀로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십수년간의 전적으로는 사상 최강의 기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평가는 그의 전성기만 국한해서 내린 것은 아니다. 이창호를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당대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둑 역사를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그의 실력과 업적을 견주어봐야만 한다.

이렇게 바둑 역사의 통시적 업적과 당대의 경기력 양면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기사로는 4대 혼인보 도사쿠, 오청원, 이창호를 들 수 있고, 현대 바둑에 한정한다면 오청원과 이창호를 든다.

세계 바둑계에서 오청원은 신포석을 통해 반상의 혁신과 현대바둑의 출발을 만들어 내었다. 기력 면에서 오청원이 활동할 당시의 바둑은 수준으로 보나 저변으로 보나 일본이 독보적인 최강국이었고, 그 일본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10번기에서 죄다 떡실신시키며 치수를 고쳐버린 전적은 현대바둑에서 다시 나올 수나 있을까 싶은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10번기는 단순히 상금 다툼이 아니라, 4승 차 이상 패배시 치수가 하향조정되어 '나는 당신보다 하수입니다.'를 공식 인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프로기사의 명예가 걸린 진검승부였고, 승부의 압박감이 여타 다른 대회와 차원이 달랐다. 오청원은 그런 승부를 무려 17년 동안 11차례나 치르며 모두 승리했고, 1939년부터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 1956년까지 이창호 못지 않게 오랜 전성기를 보냈다.

사실 누가 최고냐 하는 건 주관이 섞일 수밖에 없고 정답이 없는 질문이다. 이창호는 국내를 평정하고 국제대회까지 평정하고 현대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최강자로 보아야 하며, 오청원은 현대 바둑기전 시스템이 자리 잡기 전 바둑계에 신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그 패러다임이 실제로 막강함을 실전에서 입증한 선지자로 보면 된다. 둘 중에 누가 더 위대한 기사인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오청원 포석 정석 분야를 개척했고, 이창호는 중반과 끝내기 분야를 개척했다. 그 이전까지 중국 바둑은 묘수풀이를 이용한 전투 일변도였고, 일본바둑 역시 포석의 연구를 하긴 했지만 이 없었기 때문에, 18세기~19세기에 발명된 포석 형식에 갇혀 있었다. 오청원은 신포석과 화점 발견으로 바둑계를 한번 갈아 엎었고, 한참 후에 나온 이창호는 중반전에서 두터움과 끝내기 분야를 개척하여 바둑기사들의 수명을 줄여버렸다. 계산바둑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 오청원과 이창호를 두고 뉴턴 아인슈타인의 비유를 든 것이 가장 유사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말하면 이창호는 단순히 실력이 좋은 게 아니라 바둑의 메타를 바꾼 것이다. 오청원이 신포석을 개발하여 메타를 바꾸자 오청원 체제가 1990년대까지 오는데, 이창호는 끝내기 메타를 창안한 것이다. 이창호의 메타를 깨기 위해 수많은 바둑기사들이 도전했지만 결국 이창호를 깨기 위한 공격적인 메타가 나왔을 뿐이지 결국 2010년대까지 바둑기사들은 이창호의 메타를 의식하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창호가 보여준 '끊임없는 형세판단'은 그 이후로, 모든 기사들에게는 기본이 되었다.

2016년 알파고의 등장으로 '인공지능 메타'가 창시되었고, 딥마인드의 논문을 바탕으로 제작한 고성능 바둑 AI들이 인터넷상에 풀리자 인공지능 메타를 자가 것으로 삼는 프로바둑기사들이 늘어났다. 이런 AI들이 풀리기 전까지는 사람의 머리만으로 알파고의 기보를 해석해야 해서 답보 상태였지만,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AI들이 풀리자 슬슬 해답의 실마리가 풀린 것이다.

3. 생애

1975년 7월 29일, 아버지 이재룡, 어머니 채수희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현재의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와 달리 어릴 적의 이창호는 곱게 자란 부자집 도련님에 꽤 고집이 세고 식탐도 있던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에 따르면 어릴 적 이창호가 문구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 사주자 아무 말 없이 씩씩거리다가 그대로 문구점 유리에 몸을 내던져 머리를 박고 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무서운건 깨진 유리에 머리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붕대를 감고 온 뒤 다음날에도 바둑을 두었다고... 물론 그런 고집이 후에 뚝심이 되어 천재라는 속성과 합쳐져 돌부처 바둑신 이창호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4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였던 이화춘(86년 사망)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 이창호는 84년 두 차례의 시험기를 거치며 이정옥 六단, 전영선 七단을 사사하며 성장해 나간 그는 10살이 되던 해, 그 유명한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가, 11세에 최연소 기록 2위로 프로에 입단했다. 바둑을 배운 지 4년 만에 입단할 정도이니 대단한 기재를 소유한 셈. 그리고 입단 시험도 10살 때 한 번 보고 떨어진 후 다음 해인 11살 때 통과한 것으로 보아 배운 지 3년 만에 연구생 1조까지 올랐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조훈현은 이창호의 이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늦게 입단해서 정말 천재가 맞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다만 훗날 조훈현의 천재관이 바뀌어 아래에도 나와 있듯 이세돌, 박정환 등은 천재가 아니라 하며 이창호야말로 진짜 천재였다는 말을 한다. 조훈현 국수 본인이 최연소 입단 기록(9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들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훈현이 서로 사이가 영 좋지 않았음에도 서봉수는 그를 타고난 천재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음을 보면 조훈현의 눈높이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생각하는 천재의 기준 자체가 초단기 성장의 기린아 스타일에 좀 더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창호는 어린 시절엔 방금 둔 바둑도 잘 복기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묵묵하고 생각이 깊지만 쉽게 그 지적 능력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영리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런 조훈현이 생각하는 '협소한 의미로' 천재가 아닐 뿐, 조훈현이 이창호를 일반적인 의미로 천재도 아니라고 여기진 않았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달라는 제안을 받기 전에도 '나도 한국 바둑에 제대로 된 대기사가 될 후배 하나는 만들어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있었다. 제안을 받자 '최소한 내 눈에 천재로 느껴질 정도로는 보여야 제자로 받겠다.'고 선언하여, 엄연히 바둑으로 이창호를 직접 테스트하고 천재 기질을 직접 확인하고는 내제자로 받았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창호는 원래 아주 크게 될 아이었으니 절대 내가 창호를 다 키웠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창호가 나에게 배웠다는 것 자체는 내게 자랑을 넘어 영광이고, 창호를 통해 나도 바둑계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아 기쁘다고 느끼며 산다.'는 말을 여러 인터뷰에서 한 바 있다. 논리적으로 이창호가 초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장기간 바둑 황제 이창호로서의 세계 바둑 군림은 오로지 조훈현의 위대한 가르침 탓이라고 생각해야 맞고, 아무리 겸손하게 말하더라도 자신이 커다란 뭔가 하나는 가르쳤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훈현은 한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 10대 초중반부터 이창호의 바둑 색깔은 조훈현과 많이 달랐다. 단지 조훈현 입장에서는 어린 이창호에게 자신이 주려 한 색깔과 입단 후 이창호의 혁명적 바둑 패러다임의 방향이 달라서 아쉬웠던 것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이창호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번뜩이는 수와 같이 묘수를 잘 두는 사람을 천재로 보는 사람들은 이창호가 인내의 천재, 노력의 천재이지만, 말 그대로의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조훈현도 말했다시피 이창호의 천재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 조훈현 같은 사람도 몰라 봤는데 일반인이 알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이창호의 천재성을 느끼려면 이창호와 대국을 해봐야 안다는 말도 있다. 바둑 전문가 10명 중 7명이 이창호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점, 15세도 채 안된 어린 나이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세계 정상에 군림한 점을 보면 천재가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어렵다. 사고 방식도 애늙은이 수준으로 노련했다. 즉, 전문가들도 깜빡 속을 선천적인 실력을 감추는 타고난 천재. 이창호 특유의 결이 다른 천재성은 그가 두는 묘수에서도 그 일면이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묘수들이 생각도 하지 못한 곳에 두어져서 국면을 바꾸고 우위의 격차를 크게 만드는 수 등의 성격으로 중반 전투, 사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묘수라면, 이창호의 묘수는 이미 알고 있는 수이지만 대체로 좋지 않은 수라서 무의식적으로 배제되는데 두어지고 보니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가치가 있는 '그 상황에서만 좋은 의미를 갖게 되는 수'이거나 이미 정리가 거의 다 됐다고 생각된 판에서 미세한 수순의 차이로 미세한 이득을 얻어내서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미세하지만 역전을 만들어내는 등의 수순의 묘수, 끝내기의 묘수가 많다. 이런 묘수에 당하는 상대편 쪽은 바둑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정도 자기 두고 싶은대로 만족스럽게 다 두고 판도 다 끝난 마당이고 계가 역시 본인의 계산으로는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종반 50수 가량에 묘수를 맞아 바둑은 역전이 되고 정작 자신이 재역전을 노리려고 해도 둘 곳 자체가 없는 그런 결말로 패배하게 된다. 묘수 3번 두면 진다는 바둑 격언을 떠올려보면 더 무서운 묘수인 셈.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16]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 1914-20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 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올해 우리 나이로 백 한 살이지만,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 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 되는 게 바둑이다.


여튼 이창호는 프로기사가 된 후에도 남들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13살의 나이에 바둑왕전 타이틀을 따냈다. 아무리 당시 한국기원의 선수층이 얇았다지만 조훈현, 서봉수 다음의 '도전 5강'(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이 10년의 도전 속에서도 단 하나의 타이틀만을 딴 것을 감안한다면 이창호의 13세 우승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89년 제18기 KBS 바둑왕전 결승국 실황. 빨간 옷이 이창호, 왼편은 김수장 七단[18].

이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14세 때 타이틀 수를 늘리더니 15세 땐 조훈현과의 번기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한국 최고의 다관왕이 된다. 프로기사로 입단해도 빠르다는 소릴 듣는 나이에 이미 한국 프로기사의 정점에 섰으니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현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1991년 제22기 명인전의 제3국. 왼쪽이 스승 조훈현이고 오른쪽이 이창호. 이창호는 내리 3판을 이겨 스승을 꺾어버렸다. 조 국수가 심란한지 기이한 자세로 앉아서 긁적인다. 조 국수 뒤의 안경을 쓴 분이 대한민국 유일의 대국수인 조남철.

이창호가 스승의 타이틀을 계속 빼앗아 오면서 집에 오면서 어색한 시간이 늘어갔다. 조훈현 九단의 부인 정미화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창호가 밤 늦게까지 복기를 하고 있을 때 창호 방에서 돌을 두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남편을 꺾기 위한 것인가'란 생각과 함께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고 한다. 더불어 승리한 제자와 패배한 남편을 한 차에 태우고 오는 날에는 만감이 엇갈렸다고 한다. 사실상 남편의 내제자라는 건 부인 입장에서 자식이랑 비슷한 것이었다. 실제로 정미화 여사는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입가 후 혼자 씻지도 못하던 이창호를 한동안 매일 같이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아들처럼 키웠다고 한다. 그런 입장에서 몇 년 만에 급격한 성장으로 자기 남편을 이기고 우승을 하기도 했으니 기분이 섭섭하며 착잡했을 수 있다. 이창호 또한 조훈현 내외를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창호의 결혼식 때 확인할 수 있다.[19] 결국 조훈현 평창동으로 이사를 할 때 분가하게 된다.[20]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보통 천재는 반짝반짝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 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 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21]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 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 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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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어린 나이에 한국 바둑의 정점에 서자 일본에서는 '일본기원과 바꾸더라도 이창호를 사고 싶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소년 이창호에 대해 일본 기사[22]들은 강한 호기심을 가졌고, 공교롭게도 린하이펑이라는 거물급 기사와 세계대회(제3회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하는데, 이 커다란 승부에서 이창호가 승리했다.(3:2)[23]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강 기사였던 조치훈 九단은 이창호와의 동양증권배 5번기 결승을 앞두고 조훈현에게 "제자한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 것 아닌가? 그래 가지고서 뭘 배우겠는가."라고 말했는데 "그럼 한번 둬 봐."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뒤 벌어진 번기에서 초반은 조치훈이 좋았으나 중후반 이창호의 추격에 2, 3국을 반집으로 내주면서 0-3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창호는 누구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이다.

그 뒤 기복 없이 꾸준히 성적을 내 당시 절대 본좌였던 스승인 조훈현을 결국 무관으로 만들어 버리고 1994년에 13관왕[24]을 하는 등 독주하였다. 이런 독주는 그야말로 우악스러울 정도였고, 기간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15년이 약간 안 될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이창호는 승률왕을 독식하였으며 일 년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한 80%대의 승률을 수 차례에 걸쳐 달성했다. 이창호 평생 승률이 73%이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전설인 셈.

통산 레이팅으로만 보면 1995년 8월 말이 최전성기이다.[25]

1996년 6월에 七단에서 九단으로 한국 바둑 사상 최초로 한번에 2단을 특별 승단했다. 이세돌은 승단대회를 거부하여 국제 바둑 기전 우승 시 점프 승단 규정을 만들어냈지만, 이창호는 이런 규정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특별 승단을 했다. 참고로 당시 유창혁 七단도 九단으로 같이 특별 승단 되었다.[26]

우승 역시 통산 138번의 우승[27], 조훈현의 157번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국제대회 우승을 한 기사이기도 하다.[28]

어렸을 때는 국내에서와 달리 국제대회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창호의 사실상 첫 세계 무대 데뷔였던 요다 노리모토의 특별대국을 참관한 오오다케 히데오는 '이창호의 바둑은 분명 강하지만 스승 조훈현을 이기는 데 너무 특화되어 있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동생인 이영호의 말에 따르면 보통 식사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기름기가 많은 중국 요리를 먹고 나면 반드시라 할 만큼 탈이 났다고 한다. 초기에는 아예 굶기도 했으며 라면이나 김치를 챙겨 가기도 했다. 중국어에 능통한 이영호가 중국에서 열리는 경기의 매니저를 자청한 이후부터는 대회장 주변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일식집 등을 수소문해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창호가 해외 경험을 쌓자(그래봤자 20대 초반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승률을 과시하며 세계 바둑계를 학살했다. 딱 한번 1999년 1회 춘란배 결승에서 조훈현에게 패했을 뿐이다. 즉 결승에만 오르기만 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인 셈. 1990년대 중국 최강의 기사였으며, '이창호 빼고는 다 이겼던' 마샤오춘 九단을 만날 때마다 안드로메다로 보내 결국 재기 불능으로 몰아넣었다.[29] 일본이나 중국은 스승 조훈현은 물론 서천왕(天王)으로 불리며 중국 킬러로 군림하던 서봉수 九단 역시 벅찬데 더 괴물이 나타났으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거의 신으로 모실 정도이다. "그에게 지는 것은 한국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보다 위대함을 알려줄 뿐"이라고 할 정도니. 심지어 자신이 외계인도, 터미네이터도 아니라고 직접 해명까지 하였다! # 한 중국 네티즌은 '우리는 국가 대항전에서 중국이 이기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지만 이창호가 지는 광경 또한 보고 싶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이창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이 표현이 나온 시합에서 이창호는 혼자 중국과 일본의 대표 다섯 명을 연달아 박살내면서 한국팀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전성기 때는 수많은 전설을 일구었다. 우승률(1등을 한 기전 수 / 출전한 기전 수)을 퍼센트로 기록했다거나. 이창호의 전성기에 국내기전 우승률은 80%를 상회했고 국제기전도 엄청났다. 국제기전은 1996~99 우승률이 20회 중 10회로 50%, 메이저는 16회 중 9회로 56.3%라는 충격과 공포. 1년이 아닌 5년간 우승률이 저 정도 수치면 그야말로 괴수 그 자체. 1998년에는 당해에 있었던 메이저 국제바둑기전 삼성화재배, LG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를 싹쓸이 독식했다. 다만 결승전만 1999년에 치른 1998년 춘란배에서 조훈현 九단한테 2-1로 지면서 1998년 대회 전관왕 칭호를 따지는 못했다.

또한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과 함께 중일 슈퍼대항전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바둑 올림픽이라는 응씨배를 넷이서 초대부터 4대 대회까지 12년간 쓸어담았으니까. 특히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이창호다. 국제기전 절반을 우승하는 기사를 빼놓고 '슈퍼대항전'을 칭함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바둑계를 주름잡는 이세돌, 구리, 쿵제가 20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세계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한 것은 이창호의 노화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세 기사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적수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창호가 건재했을 땐 이들마저 이창호보단 약했다는 것. 사실 많은 기사들이 20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맞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세계 바둑을 나눠먹는 것은 이창호의 노쇠 덕을 본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현재 구리, 쿵제에 이어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했던 이세돌은 1990년대 후반기인 17세 때부터 '낌새'를 나타냈지만 이창호에 밀려 1인자가 되진 못했고, 이창호가 노화로 인해 기량이 쇠퇴한 뒤부터 비로소 제대로 두각을 드러내었음을 보면, 전성시 이창호의 기량은 최정상급의 한 수 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세돌과 이창호의 상대 전적도 이창호가 아직 앞서며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번기 대결에서도 이창호가 7승 3패로 우위라는 점은 이창호가 그만큼 강했다는 얘기. 단지 현재 바둑계의 추세상 대부분 기전이 속기인데다 이창호의 강점인 정밀한 끝내기가 눈에 띄게 약해진 점을 감안한다면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성적을 내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이창호와 비슷한 또래인 기사들은 한중일 통틀어 모두 한물간 것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이창호니까 한국 랭킹 2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스승의 업적들을 거의 물려받긴 했지만 단 두 가지 물려받지 못한 기록이 있다. 첫째는 전관왕, 둘째로는 연속 타이틀 홀딩 기록.[30] 1994년 왕위전 타이틀을 유창혁이 방어하면서[31] 조훈현이 이룩한 전관왕 타이틀은 아직 그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32][33] 그 때의 아쉬움 때문인지 그 이후로 왕위전 만큼은 한 번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왔다.[34] 때문에 단일 기전 연속 우승 기록이 현재 12연패. 이 기록은 조훈현의 패왕전 16연패 다음의 기록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왕위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창호의 기록이 다시 한 번 스승을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이창호에게도 천적은 있다. 바로 일본 요다 노리모토. 상대 전적이 좋지 않다.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이창호 본인이 인정한 바 있다. 첫 단추[35]를 잘못 채운 탓인지, 이후 이창호는 요다만 만나면 이상하게 바둑이 꼬이곤 했다. 한때 상대 전적 1승 6패를 기록하는 등 계속 헤매다가 2000년대 들어서 상당히 만회해 둘 간 승률이 거의 대등해졌다. 그리고 8:8 상태에서 제7회 농심배 최종국에서 만났고 이제는 명실상부 우위로 올라서나 했는데, 그만 패배. 요다는 여전히 만만찮았다. 동률까지 갔지만 다시 패배하면서, 8승 10패로 다소 열세였다가 2연승을 하며 10승 10패로 맞췄다. 요다 九단에 따르면 2000국이 넘어가는 이창호 九단의 바둑을 대부분 복기해 봤다고 한다. 요다 九단에게 지고 나서는 한때 중국의 마샤오춘 九단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역전한다. 2000년대 후반에 와서는 강동윤에게 맥을 못 추고 있다.

2005년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항 연승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당시 개인 기록이 꽤 부진한 시기였던데다가 한국팀의 나머지 인원이 일찌감치 충격적인 광탈을 해 버린 나머지 한국팀에는 이창호 혼자만이, 중국과 일본팀에는 합이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에서는 혼자 남은 이창호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고 우승컵을 한국팀에 가져다 줄 확률을 3% 미만으로 계산하기도 했을 정도. 오죽하면 당시 한국팀 단장인 김인 九단이 "우승은 역시 어려울 것 같다"는 인터뷰를 했겠는가… 그런데 혼자 남은 이창호가 정말로 나머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 버리고 우승컵을 한국팀에게 가져다 주고 말았다![36]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자세한 요약. 상하이 대첩 문서 참고. 이 사건 이후 창하오 9단은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 때부터 시작이다." 하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상하이 대첩 이후부터 이창호의 부진이 꽤 길다. 무엇보다 전세계가 이창호의 바둑을 연구하기 시작하니 결국 중국의 구리 등의 기사나 한국의 최철한 등이 강력한 전투력을 앞세워 이창호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창호 이후 끝내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현재는 신예 기사들의 끝내기 실력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것도 이유일 것이다. 또한 실수를 적게 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그가 실수가 잦아지고 끝내기에서 미스가 속출하면서 예전처럼 둘 수 없는 이유도 있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제 13회 LG배에서 우승한 구리에게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질문하자 이런저런 말을 하고 말미에 "이창호에 비하면 이세돌과 나는 아직 멀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휴직하기 전 명실상부 국내, 세계 1인자였던 이세돌은 이제 그만 1인자임을 인정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 국수에게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두 차례 이상 답했다. 이창호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2010년 1월 16일 제2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64강전에서 17세의 연구생에게 패배, 탈락했다.#관련기사 그냥 진 것도 아니고 100수도 못 채우고 불계패했다.[38]

2010년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혼자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류싱, 구리, 창하오를 꺾으며 3연승, 한국의 8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2010년 11월 한국 랭킹이 6위까지 떨어지고, 승률도 60%가 안 나왔다. 입단한 이래 최악의 성적. 이 때문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 멤버가 되었으면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11월 23일 광저우 기원에서 열린 남자 단체전 예선리그 2라운드에서 한국 남자팀의 승리에 일조, 특히 또 하나의 '이창호 킬러'로 불릴 정도로 근래 상대 전적이 우세하던 창하오 九단을 다시금 제압하여 역시 이창호다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5일 일본과의 대국에서는 이세돌과 함께 지는 바람에 대표팀은 최철한을 비롯해 나머지 3인이 분발하여 승리, 간신히 결승에 올라갔다. 26일 단체전 결승전에서 제1장으로 나서 중국 랭킹 3위 구리를 관광보내며,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오전 예선 6R에서 패해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점심 먹고 와서… 구리 역시 이창호 못지 않게 부진을 겪고 있긴 하지만, 대국의 내용은 전성기의 이창호 바둑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중계 해설의 평.

바둑 팬들은 부진한 때에도 진로배, 농심신라면배 등 단체전에서는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2010년 제11회 대회 포함 농심신라면배 성적 19승 3패, 승률 86%[39]) 이창호가 믿음을 깨지 않고, 이번에도 활약을 해줘서 '역시 이창호…'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011년 2월 14일 최철한 九단에게 패배하며 데뷔 이후 첫 무관.

2013년 1월 7일 랭킹 1위 이세돌, 떠오르는 신성 박정환을 연파하며 KBS 바둑왕전 결승에 진출했다. 만약 우승한다면 2010년 국수전 이후 3년여 만에 우승컵을 추가하는 것.

2013년 2월 1일 패자조 결승에서 이세돌 九단을 격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박정환 九단과 결승전을 치뤄 결승 1국에서 승리했으나 2월 2일 2국과 2월 4일 열린 최종 3국에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번 패배로 박정환 九단과의 전적은 6승 10패가 되었고 랭킹도 14위까지 떨어졌다.

2013년 4월 6일에 열린 제9회 한국물가정보배 예선 2회차에서부터 5월 6일에 벌어진 제18회 박카스배 천원전 예선 3회차까지 12연승을 달렸다. 랭킹도 10위권에 재진입.

2013년 7월 16일 벌어진 제1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대표 선출을 위한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에선 이세돌 九단도 탈락해 많은 이들이 이변이라고 할 정도.[40]

2014년부터 들이 커가면서 이창호 九단의 활동이 크게 줄었다. 2016년 현재 아직 한국기원에 현역 프로기사로 등재되어 있긴 하지만 시니어급 대회말고는 기전 출전도 크게 줄어 이제는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상황.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말 그대로 '평범한 가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41]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1국 때 이세돌 九단을 응원하기 위해 잠깐 나왔었고, 2016년 3월 25일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 바둑계 오찬 행사에도 유창혁 九단, 이세돌 九단 등과 함께 배석하기는 했다. 하지만 따로 언급은 않고 그냥 들러리 서는 수준.


그런데 2016년 갑자기 한국바둑리그에 정관장 팀 김영삼 감독에 의해 2지명(부장)으로 지명받아 바둑 현업에 복귀하게 되었다.[42] 김영삼 9단의 선택이 확 깨는 이유는 정관장 팀 1지명(대장)이 신진서 5단(최연소 주장, 만 16세)인 데다가 2지명을 한동안 바둑계에서 떠나 있던 이창호 9단을 지명했기 때문이다. 2016 한국바둑리그 화제의 팀이 될 듯.

조훈현과 분가한 이후에도 한동안 종로구 - 성북구 쪽에 살다가 2010년대 들어서 딸들 교육 문제로 강남구로 이사가서 살고 있다. 가끔씩 한국기원(상왕십리역)에 나타나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방문 이후에 건대입구역이나 노량진역 근처의 오락실에 출몰한다. 전성기 시절에도 외국에 나가서도 오락실을 자주 갔다고 한다.


2016년 한국바둑리그 이창호九단 승리 세리머니.

2016년 한국바둑리그에 나왔는데 리그를 씹어먹었다. 8월 2일 현재 정관장팀 주장인 신진서 6단이 8전 전승을 기록했는데 40세를 넘은 이창호 9단이 6승 2패를 달렸다. 정관장팀을 뽑은 김영삼 九단이 보고 놀라고 있는 수준이다. 5지명으로 정관장팀에 턱걸이 입성한 박진솔 5단도 6승 2패로 리그를 씹어먹는 중. 신진서(주장) - 이창호(2지명) - 박진솔(5지명) 3명이 20승을 합작했는데 정관장팀 총 개인 승수가 25승이다. 이 세 명이 리그를 나란히 씹어먹다보니 8라운드 중에서 정관장팀이 무려 7승 1패로 단독 선두 질주 중.

이후 후반기에 체력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이전과 같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부진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8승 8패.[43] 포스트시즌에서도 승리 없이 2패를 기록했다.


2018년 초에 한국바둑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진리배 한중바둑리그 대항전에 출전했다. 정관장황진단팀 vs 중신 베이징팀의 대항전. 이창호는 정관장황진단팀 소속이었다. 1월 19일 1차전에서 중신 베이징팀의 급격히 잘나가는 신예 한이저우 七단을 장고판에서 꺾더니, 1월 20일에는 LG배 우승 경력까지 있는 주장급 선수 퉈자시 九단을, 그것도 속기에서 꺾어서 충격을 주었다. 이창호가 한이저우-퉈자시를 나란히 꺾어버린 것을 두고 한국 바둑계보다 중국 바둑계가 더 난리가 났을 정도였다.

9월 21일 간만에 세계대회 본선 출전... 와일드카드로 나간 천부배 A조 16강전에서 셰얼하오에게 지며 바로 탈락했다.

2019년 8월 3일 국수산맥배 세계 부문에 와일드카드로 나섰지만, 16강전에서 천야오예에게 패했다.

2020년 8월 제25회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에서 시니어조(!)로 데뷔하였다.[44] 세월이... 예선 1회전에서 천풍조 九단[45]을 상대로 흑 13집반승, 2회전에서 한상열 六단[46], 3회전에서 김영삼 九단 [47], 예선 준결승전에서 서봉수 九단[48], 그리고 예선 결승전에서 최규병 九단을[49] 흑 1집반으로 승리하고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3.1. 기풍[편집]

이창호의 바둑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자면 두터움, 침착함, 형세판단, 끝내기다. 강태공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느려 보이나 두터운 행마를 주무기로 삼았다. 스승인 조훈현이 쾌속행마로 제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을 생각하면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다른 기사들이 아무리 유리해도 두텁고 침착하게 두어 정확한 끝내기로 마무리해 역전시키니 그 중압감과 패배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나이웨이가 "이창호 九단과 바둑을 두면 참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데도 바둑은 언제나 불리한 것 같다." 했을 정도.[50][51] 상대는 '초중반에 유리한 국면으로 만들지 않으면 후반에 밀릴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무리수를 두고, 그러다가 후반에 이창호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창호가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어서 분명 형세는 자신이 앞서는데도 무표정한 이창호를 보며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52] 달리 보자면 이창호는 말 그대로 늪바둑을 두는데 상대가 그 늪에 한번 빠지면 절대로 못 나온다. 상대에게 원하는 대로 둬주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건 이창호가 상대를 자신이 만든 늪 속으로 몰아넣기 위해 바람을 잡는 것일 뿐이다.

조훈현이 이창호의 전성기에 계속 당했던 패턴이 바로 이것으로, 초중반 조훈현 쾌속행마로 우세 → 조훈현의 무리수 → 이창호의 끝내기로 역전 식으로 계속 당했다. 아직도 끝내기와 형세 판단에 있어서는 이창호가 최정상급임을 인정받고 있으며, 하물며 전성기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모여 관전할 때 끝내기 즈음이 되면, "창호 어디갔어? 창호한테 물어봐!"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왔다고 한다. 양재호에 따르면 이창호는 극초반부터 계가를 한다고 한다. 프로라면 계가 판단이야 모두 가능한 일이지만, 초, 중반부터 집이 명확하지 않고 형세가 돌 하나하나에 따라 계속 왔다갔다하는데도 계가를 시합 내내 거듭하며 종국까지 숙고할 수 있는 끈기와 계산력을 겸비한 기사는 이창호를 비롯해 소수의 몇몇뿐이다.[53]

고수 치고는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에게도 반집 승부가 많이 나는 기사 중 하나이다. 때문에 하수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몇 번만 더 둬보면 그 반집 차이가 타 기사의 백집 차이보다 크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반집 승부를 하는 이유는 반집으로 이기나 불계로 이기나 이기는 것은 똑같기 때문. 또한 무조건 잡을 것 같은 대마를 잡지 않는 습관도 있는데, 그 이유는 대마를 잡으려다 보면 운과 실수로 판이 뒤집힐 수도 있지만 대마를 죽이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이득을 취해 계가로 가면 반드시 이길 수 있어서라고 한다.

이는 스승 조훈현 九단도 언급한 적이 있는 부분인데, 이창호가 프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초반에 유리한 바둑에서도 대마를 노리거나 큰 집 차이로 이기는 걸 노리지 않고 작은 집 차이로 이기는 승부를 많이 하자 혹시 어떤 연유로든 큰 집 차이 승부를 못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창호와 그러한 대국들에 대해 복기를 하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이창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큰 집 승부를 하려면 대마를 잡아야 하는데 대마를 잡기 위해 준동하다간 상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대마를 살려주는 대신 다른 곳에서 차근차근 대가를 치르게 하면 작은 집 차이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말은 반상에서 수십 년 정진한 노년 기사들이 새파란 신생 기재들에게 일러주는 충고에 알맞지, 중학생 정도의 어린아이가 스스로 깨우치고 실행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한창 성장하는 어린 기사라면 당연히 싸움을 좋아하고 상대를 통쾌하게 누르는 대승을 원하기 마련이다. 이창호는 당시 승부의 본질을 꿰뚫는 확고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九단이 신문 인터뷰에서도 한 적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가 바둑TV에서 해설을 하던 때에도 대국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상대 진행자와 이창호에 대한 대화를 잠시 나누다가 직접 담담히 말한 적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진 사람은 반 집에 땅을 치지만, 그런 상대를 보고 창호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물러서서 그런 건데, 억울해 하실 것이 없는데?'하면서 말이다.[54]

ㅡ조훈현 (월간조선 02년 4월호)

그런데 2005년 이후 부진이 계속되면서[55] 기풍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먹잇감이었던 창하오에게 세계대회 결승에서 두 번 만나 두 번 다 준우승하기도 하고,[56] 국내에서는 목소리가 여린 후배나, 갑자기 나타나 대마를 때려잡는 후배 또는 이창호 잡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닥치고 전투 이후 대마를 잡아먹는 바둑도 자주 보여주신다. 대단한 것은 기풍도 바뀌고, 예전처럼 정확한 형세판단을 보여주지 못하면서도 항상 정상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이창호 스타일의 바둑은 계속 이겨서 재미없으니까 저렇게 둔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부처가 아수라의 칼을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기풍 변화를 두고 본인 자서전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초반에 안정적으로 두어서 불리하게 출발하더라도 중후반에 타개와 끝내기로 역전하는 기존 기풍을 유지하면 본인보다 끝내기가 더 정밀한 후배 기사들에게 밀릴 것 같아서, 초반부터 전투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 가는 방향으로 기풍을 바꾸었다고 한다.

2016년 3월 이세돌 九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3연패를 당하던 시기에는 그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다. 관전 중 던진 한마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이창호 九단의 견해는 당시 해설하던 그 어느 프로기사들 보다 정확하다고 결론이 나왔다. 2국에서 알파고의 수를 해설하던 기사들조차도 '인간들 중에서 이런 수를 둘 만한 사람이 이창호밖에 없다!'며 흥분하는 등 그가 남긴 족적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보여주었다. 압도적인 계산력으로 승리를 따내는 알파고의 기풍과,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데도 이기는 스타일이 전성기 시절 이창호 九단과 가장 흡사한 것 같다는 분석이 많이 나오곤 했다. 지금도 우스개로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와 알파고가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 하는 VS놀이를 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였다면 알파고를 발랐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진지하게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알파고에 대해 더 알려진 뒤로는 아무리 전성기 이창호라고 해도 이세돌이 알파고와의 대국 전에 호언장담했듯 손쉽게 5대0이나 4대1 승부를 내기는 힘들 거라고 보는 의견이 대세이다. [57][58], 이후 알파고가 마스터로 버전업되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되어버렸지만[59], 그만큼 지금까지도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가 강력한 승리 철학과 수읽기로 무장하고 있었던 기사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자서전인 이창호의 부득탐승('11년 8월 발간)을 읽어보길 바란다. 본인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이야기까지 담아놓은 책이다.

2016년 시점에는 한국바둑리그에서 대마를 때려잡는 바둑은 조금 지양하고 예전처럼 끝내기 공부를 하는 듯한 기풍이 드러나고 있다. 대신에 마샤오춘이나 구리처럼 초반에 포석을 잘 깔고 그 포석의 우세를 지키려는 바둑을 둔다. 문제는 창하오 九단한테는 약해졌다는 것.

3.2. 주요 묘수들[편집]

바둑의 메타를 바꾸다 보니 묘수가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특히 많았던 것은 끝내기의 묘수, 축머리의 묘수이다. 축머리의 묘수 중 진신두는 한국 바둑 최초로 발견했고, 이른바 자폭의 묘수와 같은 트릭, 공배의 묘수와 같은 전설 속에 묻혀 있던 묘수들도 있다.


1989년 국수전(vs 조훈현) 대국에서 작렬한 끝내기 묘수(1분부터). 이창호가 三단이던 시절 끝내기에 강하다는 것을 처음 보여준 바둑이었다. 사실상 이창호 묘수의 신호탄. 이때에는 이 끝내기 묘수로 판은 이겼지만 아직까지 조훈현에게 이기진 못했고(3-1로 조훈현 타이틀 방어), 이듬해(1990) 조훈현을 3:0으로 관광보내고 국수전 타이틀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 묘수가 인공지능으로 확인해 본 결과 1선에 붙이는 수는 좋은 수가 맞지만 그 이후 전개는 바둑의 전체적인 판도에서는 그렇게 좋은 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창호의 1996년 국수전서 작렬한 끝내기 묘수(1:07 부터). 이 수는 바둑계에 끝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이창호식 '숨은 한집'을 찾아낸 끝내기 묘수(01:00부터). 2000년 응씨배 8강전. 하필이면 이 대국 상대가 이창호 천적 요다 노리모토라서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바둑이다. 눈알 터지는 반집 끝내기 승부 상황에서 이창호가 요다 노리모토의 집을 선수로 한 집 깎는 엄청난 묘수를 작렬하고 요다가 한방에 무너져 버리는 상황이다.


1997년 동양증권배에서 마샤오춘을 재기불능으로 몰아넣은 기상천외한 축머리 묘수.(01:00 부터) 이창호 축머리 묘수 중에서 '삼신기'로 불린다. 이 외에도 이창호의 유명한 묘수 5개를 선별한 영상이니 끝까지 보길 권한다.


2000년 응씨배 4강전에서 위빈 九단한테 작렬한 자폭의 묘수(01:00부터). 이창호 스스로 자폭을 해서 위빈의 선수를 빼앗아 골로 보내는 장면이다. # 동영상에도 나오지만 위빈은 이창호의 자폭 묘수 한방에 멘탈붕괴 상태가 되어서 2국에서 초반에 바둑을 말아먹고 이창호를 결승으로 올려보낸다. 그리고 그 결승에서 창하오 九단한테 3:1로 우승을 따냈다. 이 2000년 응씨배는 16강에서 이창호를 제외한 모든 한국 바둑기사들이 전원 탈락하고, 8강에서부터 이창호 혼자서 중국, 일본기사를 꺾고 우승을 따냈다. 이 때 이창호는 왕리청-요다 노리모토-위빈-창하오를 꺾었다.

 


2003년 농심신라면배 최종국에서 중국 뤄시허 九단[60]을 상대로 시전한 공배의 묘수. 바둑 책에서나 볼법한 엄청난 묘수라서 당한 뤄시허도 멘붕하고 이 대국을 검토하던 검토/해설진도 동반 멘붕한 엄청난 묘수. 또한 18분부터는 이세돌의 유명한 축 묘수에 버금가는 멋진 묘수도 볼 수 있다. 이 축에 대해 이영구 九단은 "마술 같은 축몰이"라고 평했다.기사

3.3. 바투[편집]

바투에서는 돌부처답지 않은 황당한 행동들과 이어지는 표정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특히, 헤드셋을 거꾸로 끼거나 황당한 초읽기는 백미! 이런 모습을 선보이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30대가 넘었는데도 귀엽다는 의견이 많다.

4. 여담[편집]

  • 이창호의 명언을 모아놓은 페이지를 볼 수 있다.# 사실 타인들에겐 천재 기사라고 불리지만 이창호 본인은 노력을 중시했다는걸 엿볼 수 있다.

  • 2015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등장인물 최택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과묵하고 순진한 최택의 성격, 보석상을 하시는 부친, 상술된 농심배 5연승을 연상케 하는 대국, 중국 대국시 현지요리에 적응하지 못해 배탈이 나서 식사를 거르자 매니저(동생 대신 여기선 여주인 덕선이)가 주변 일식집에서 음식을 구해오는 등 여러 부분이 차용되었다. 이창호 九단은 이 드라마를 보고 실제 자신은 어린 시절 바둑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또래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최택 六단은 동네 단짝친구들이 있어 부러웠다고 소감을 전했다.



  • 사실 이런 사진도 있을 만큼 소년기사 시절부터 격투게임의 광팬이었다. 그가 18살 때 쓴 자서전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오락실에 가서 또래 기사들과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했다고. "제가 또래 고등학생들과 비슷한 건 오락실 가서 '스트리트 파이터'를 재미있게 한다는 것 정도"라는 인터뷰도 했고, 또 이후에는 철권 시리즈 역시 재미있게 했다고 한다. 연수로 따지면 격겜만 20년차. 다른 취미로는 탁구와 테니스, 보드게임을 즐겨 하는데, 동료들이나 지인들과 보드게임을 할 때도 생각을 엄청나게 많이 하는 편이라고 한다. 가장 자주 하는 보드게임은 부루마불. 격겜 등장 이전에도 게임을 무척 즐겨한다는 소문이 났는지 우리나라 최초의 게임잡지인 게임월드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바둑 평론가인 박치문 아마 7단은 대국료를 받아 아이스바를 하나 사물고 오락실에 가던 소년 이창호의 모습을 회상하는 칼럼을 쓴 적도 있다.

  • 2018년 이후에는 강남구에 거주 중인데, 강남에는 오락실이 제대로 된 곳이 없어서 건대입구역 근처의 오락실에서 출몰했다는 정보가 있다. 이창호 九단이 건대 쪽 오락실에 나타나서 깜짝 놀란다는 후문도 있고, 연세가 40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철권 시리즈에서 꽤나 실력이 좋다는 경험담이 있다.



훈련병 시절 이창호의 굳건한 경례.

  • 한 분야의 천재라고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진 않다는 사례의 표본이다.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의 증언에 따르면, 내제자로 들였을 때 머리조차 혼자 감지 못해 감겨줬어야 했다고 한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애지중지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인 성장이 늦은 편이었다. 물론 내제자로 처음 들어간 것이 10살 때니 그 나이에 혼자 머리를 감지 못하는 아이도 있긴 하지만... 신발끈도 혼자 묶지 못해 한번 풀어지면 누군가가 묶어줄 때까지 그냥 풀어진 끈을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편 1996년, 한국바둑의 국보에게 병역 혜택을 주느냐 마느냐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절이 있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 105명이 연명으로 진정서를 내는(...) 사상 초유의 사건까지 발생하고 나서 이창호는 사단 훈련소에 입소한다. 훈련소에서 기본 병영훈련을 받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다는 조건이었고, 소속 부대는 한국기원, 부대장은 한국기원 이사장.#[62] 여튼 훈련소에서 훈련하는데 집합을 할 때면 항상 이창호가 없었고 교관이 내무반에 가서 보면 군화끈을 못 매서 쩔쩔매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라면 바로 기합이었겠으나 천하의 이창호를 차마 기합 줄 수 없어서 고민하던 교관이 결국 똑딱이 군화를 만들어 신겼다고. 조훈현의 집에서 지낼 때도 운동화 끈을 못매서 정미화씨가 찍찍이를 신기거나 신발끈을 대신 매줬는데 그게 군대 무렵까지도 이어졌던 듯. 바둑 관계자들이 우스개로 하는 소리 중 스승인 조훈현은 무슨 일을 하든 성공했을 것 같은데 이창호는 모르겠다는 말도 있다.[63] 물론 과묵하고 숫기가 없는 스타일이라 그렇지 사회생활 멀쩡히 잘한다. 오해하지 말자.

  • 스승인 조훈현과의 전적은 이창호가 훨씬 앞서지만[64] 이창호와 조훈현의 대국은 언제나 최고의 관심사가 된다.[65]

  • 이영도의 장편소설 피를 마시는 새의 등장인물 엘시 에더리의 모델이 이창호라는 설이 있다.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는데 귀신 같이 이기는 바둑 스타일이 일치한다. 반면 엘시가 주장한 전쟁의 진선미[66]를 보아 쾌속행마 조훈현이나 무쌍 이세돌이 모티브에 더 맞다는 의견도 있다. 한편, 엘시 에더리 이름 자체가 이세돌 이름의 아나그램이라는 설도 있다.

  •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광저우 조직위에서 발행한 소식지에 한국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로 박태환, 장미란, 이창호를 꼽았다. 바둑팬이 아니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바둑과 이창호의 중국에서의 큰 위상을 보여주는 바둑기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셋 다 그 해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의 견제를 물치치고 금메달을 따냈다. 셋 다 흠좀무..

  • 제1회 토요타덴소배 세계 바둑 왕좌전(토요타덴소배) 우승으로 받은 부상인 렉서스 LS430 자동차 2017년 현재까지도 몰고 있다. 하지만 이창호 본인은 거의 몰지 않고 친한 친구인 김영삼 九단이 대신 몰고 다닌다고 한다(김영삼 九단이 바둑TV해설에서 언급).

  • 2016년 창하오와의 대국 후에 나온 유명한 짤방이다. 사실 이 때는 창하오가 이창호를 이겼는데, 후에 회식 자리에서 추가로 복기를 청하며 창하오가 이창호한테 공손히 무릎을 꿇은 것. 바둑 갤러리에서 잊을 만하면 합성소재로 활용되는 필수요소이다.

  • 어떤 사람이든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하기 마련인데, 이창호에 대해서는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누구도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독설가로 유명한 마샤오춘이나, 거침없는 표현으로 유명한 이세돌조차도 이창호에 대해서는 예의를 갖춘다. 한마디로 실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뜻. 마샤오춘은 이창호가 술을 따랐을때 매우 공손하면서도 예의바르게 받았다.

  • 굉장히 겸손한 성품으로 유명하다. 인터뷰에서도 항상 상대 대국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고, 본인에 대해서도 굉장히 겸손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독설은 일절 하지않는 편이다. 그리고 굉장히 차분한 편이다.

4.1. 약력[편집]

  • 조훈현 九단 문하.[67]

  •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13세, 제8기 바둑왕전)

  • 최연소 세계챔피언(17세, 제3기 동양증권배).

  • 연간 최다대국(1989년, 111국), 최다연승(41연승), 연간 최고승률(78승 12패, 86.7%)[68], 연간 최다승(90승), 국내 16개 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1994년, 제18기 기왕전 우승), 최다관왕 기록(13관왕).

  • 문화체육부에서 은관문화훈장(2등급) 서훈(1996년).

  • 5년연속 최우수기사(1995년~99년).

  • 그랜드슬램 달성(2003년, 제4회 춘란배 우승)

  • 2008년 2월 5일 현재 통산 135회 우승(비공식 기전인 타이다배와 세계최강결정전 포함)

  • 역대 최연소 1500승 달성(35세, 제28기 KBS바둑왕전)


1986년: 입단(11세 1개월, 조훈현 九단에 이어 최연소 입단기록 2위)
1988년: 제8기 KBS바둑왕전 우승(첫 타이틀 획득, 세계최연소)
1990년: 국수, 최고위, 신왕전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준우승. 41연승. 78승 12패로 승률 86.7%
1991년: 명인,최고위,대왕, 왕위, 박카스, 제왕 우승
1992년: 동양증권배 우승(최연소 세계챔피언). 명인, 최고위, 대왕, 비씨카드,박카스, 제왕, KBS우승.
1993년: 국수, 명인, 대왕,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박카스, 제왕, SBS 우승. 90승으로 통산최다승 기록보유.
1994년: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국내 16개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 13관왕으로 통산 최다관왕.

1995년: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
1996년: 九단 특별승단(세계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국수,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국기, 기성, 천원 우승.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세계바둑최강 결정전 우승.
1997년: 국수, 최고위, 대왕, 왕위, BC카드, 배달왕,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8년: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9년: 기성, KBS, 최고위, 명인, 왕위, 천원 우승
2000년: 기성, 왕위, 명인, 우승
2001년: 통산 1백회 우승. 응씨배 우승, LG배 우승. 기성, 패왕, 명인 우승
2002년: 통산 1천승 달성. 농심신라면배 우승. TV바둑아시아컵 우승. 기성 방어. 패왕 우승, 왕위 우승. 토요타덴소배 결승진출, 명인 우승. KBS바둑왕전 우승. 제4회 농심辛라면배 한국대표(한국우승)

2003년

  • 제1회 토요타덴소배 우승, 제46기 국수전 우승. 제4회 춘란배 우승. 제2회 KT배 4강. 제7회 LG배 준우승(대 이세돌). 제14기 기성전 우승(11연패). 제2회 CSK배 바둑아시아대항전 한국대표.

  • 제22기 KBS바둑왕전 본선. 제8기 LG정유배 우승. 제37기 패왕전 준우승. 제16회 후지쯔배 3위. 제37기 왕위전 우승(8연패). 제8회 삼성화재배 8강. TV바둑아시아 본선. 제5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제34기 SK엔크린배 명인전 우승.


2004년

  • 제5회 농심신라면배 한국우승(5연패).

  • 제47기 국수전 준우승(대 최철한, 2승3패).

  • 제8회 LG배 우승(대 목진석, LG배 통산4회 우승,세계대회 통산19회 우승 달성).

  • 제15기 기성전 준우승(대 최철한).

  • 2004한국바둑리그 본선(피더하우스 주장).

  • 제38기 왕위전 우승(대 이세돌 3-2, 9연패 달성).

  • 제9기 LG정유배 우승(대 박영훈 3-0, LG정유배 통산 5회 우승).

  • 제23기 KBS바둑왕전 우승(대 조한승 2-0, KBS바둑왕전 통산 7회 우승).


2005년

  • 제48기 국수전 준우승(대 최철한).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우승 리드(5연승, 한국 6연패).

  • 제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2연패 달성).

  • 제2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

  • 제39기 왕위전 우승(대 옥득진, 왕위10연패 달성).

  • 제1기 한국물가정보배 준우승(대 박영훈 九단 0:2)

  • 제10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 준우승(대 최철한 九단 2:3)

  • 제10회 삼성화재배 준우승(대 뤄시허 九단 1:2)


2006년

  • 01.22 제1기 원익배 우승(대 박영훈).

  • 02.24 제7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준우승, 대 요다 九단).

  • 03.02 제49기 국수전 우승(대 최철한, 탈환성공).

  • 06.27 제3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2연패, 대 박정상).

  • 07.19 제40기 왕위전 우승(11연패,대 이영구).

  • 08.11 제18회 TV바둑아시아 준우승(대 왕시 五단).


2007년

  • 01.24 제11회 삼성화재배 준우승(대 창하오 九단 1:2)

  • 02.09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주장 2연승(한국팀 우승)

  • 03.16 제50기 국수전 준우승(대 윤준상 四단 1:3)

  • 04.25 KB국민은행 2007한국바둑리그 주장(광주 kixx)

  • 07.09 제20회 후지쯔배 준우승(대 박영훈 九단 0:1)

  • 07.16 제4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준우승(대 강동윤 五단 1:2)

  • 07.18 제41기 KT배 왕위전 우승(12연패, 대 윤준상 3:2)

  • 08.17 제3회 중환배 우승(대 박정상 九단 1:0)-세계대회 통산21번째 우승!

  • 12.03 제26회 KBS바둑왕전 우승(대 조한승 九단 2:1)


2008년

  • 02.02 제3기 십단전 우승(대 목진석 九단 2:0)-135번째 우승

  • 02.20 제9회 농심배 한국대표 출전

  • 00.00 KB국민은행 2008한국바둑리그 출전(광주 Kixx)

  • 07.08 제21회 후지쯔배 준우승(대 구리 九단 0:1)

  • 08.05 제5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대 목진석 2:0)

  • 10.21 제10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출전

  • 12.11 제7회 춘란배 결승진출


2009년

  • 01.08 2008바둑대상 우수기사상, 남자인기기사상, 연승상 수상

  • 03.16 제27기 KBS바둑왕전 우승(대 이세돌 2:1)- 개인 통산 137번째 우승

  • 04.23 제6회 응씨배 준우승(대 최철한 1:3)


2010년

  • 01.18 역대 최연소 1500승 달성

  • 03.23 국수전 우승(대 홍기표 3:1)

  • 11.26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 금메달


2011년

  • 02.14 국수전 준우승 (대 최철한 1:3) 22년 만에 무관

  • 12.22 olleh배 준우승 (대 이세돌 1:3)


2012년

  • 02.15 LG배 준우승 (대 장웨이제 0:2)

  • 원미마오배 우승 (대 창하오 2:1)


2013년

  • 02.04 제31기 KBS바둑왕전 준우승(대 박정환 1-2)

  • 04.23 제18회 LG배 본선32강

  • 04.25 제9기 한국물가정보배 본선16강

  • 11.01 2013 olleh배 6라운드(4강)


2014년

  • KB리그 신안천일염 2지명

  • 2014 삼성화재배 본선32강(후원사 사전와일드카드)

  • 09.10 제10기 한국물가정보배 결선4강


2015년

  • 06.08 제20회 LG배 본선32강

  • 09.09 2015 삼성화재배 본선16강


2016년

  • 전자랜드배 한국바둑의 전설 대회 준우승

  •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16강

4.2. 수상 기록[편집]

 아시안 게임

금메달

2010 광저우

단체전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편집]

항목 참조.

6. 어록[편집]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 그것은 인품과 무관하며 승부사에게 패배의 아픔은 항상 생생한 날것이어야 한다. 늘 승자가 될 수는 없지만 패자의 역할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69]
ㅡ이창호 九단 「이창호의 부득탐승 - 아직 끝나지 않은 승부

7. 저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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