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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창호의 생애 - 바둑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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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7월 29일, 아버지 이재룡, 어머니 채수희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현재의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와 달리 어릴 적의 이창호는 곱게 자란 부자집 도련님에 꽤 고집이 세고 식탐도 있던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에 따르면 어릴 적 이창호가 문구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 사주자 아무 말 없이 씩씩거리다가 그대로 문구점 유리에 몸을 내던져 머리를 박고 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무서운건 깨진 유리에 머리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붕대를 감고 온 뒤 다음날에도 바둑을 두었다고... 물론 그런 고집이 후에 뚝심이 되어 천재라는 속성과 합쳐져 돌부처 바둑신 이창호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4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였던 이화춘(86년 사망)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 이창호는 84년 두 차례의 시험기를 거치며 이정옥 六단, 전영선 七단을 사사하며 성장해 나간 그는 10살이 되던 해, 그 유명한 조훈현의 내제자로 들어가, 11세에 최연소 기록 2위로 프로에 입단했다.

 

바둑을 배운 지 4년 만에 입단할 정도이니 대단한 기재를 소유한 셈. 그리고 입단 시험도 10살 때 한 번 보고 떨어진 후 다음 해인 11살 때 통과한 것으로 보아 배운 지 3년 만에 연구생 1조까지 올랐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조훈현은 이창호의 이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늦게 입단해서 정말 천재가 맞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졌다고 술회했다. 다만 훗날 조훈현의 천재관이 바뀌어 아래에도 나와 있듯 이세돌, 박정환 등은 천재가 아니라 하며 이창호야말로 진짜 천재였다는 말을 한다.

 

조훈현 국수 본인이 최연소 입단 기록(9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들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훈현이 서로 사이가 영 좋지 않았음에도 서봉수는 그를 타고난 천재로 부르길 주저하지 않음을 보면 조훈현의 눈높이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생각하는 천재의 기준 자체가 초단기 성장의 기린아 스타일에 좀 더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창호는 어린 시절엔 방금 둔 바둑도 잘 복기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묵묵하고 생각이 깊지만 쉽게 그 지적 능력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영리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런 조훈현이 생각하는 '협소한 의미로' 천재가 아닐 뿐, 조훈현이 이창호를 일반적인 의미로 천재도 아니라고 여기진 않았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달라는 제안을 받기 전에도 '나도 한국 바둑에 제대로 된 대기사가 될 후배 하나는 만들어야 한다.'는 부채 의식이 있었다.

 

제안을 받자 '최소한 내 눈에 천재로 느껴질 정도로는 보여야 제자로 받겠다.'고 선언하여, 엄연히 바둑으로 이창호를 직접 테스트하고 천재 기질을 직접 확인하고는 내제자로 받았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지금 와 돌이켜 보면 창호는 원래 아주 크게 될 아이었으니 절대 내가 창호를 다 키웠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창호가 나에게 배웠다는 것 자체는 내게 자랑을 넘어 영광이고, 창호를 통해 나도 바둑계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아 기쁘다고 느끼며 산다.'는 말을 여러 인터뷰에서 한 바 있다.

 

논리적으로 이창호가 초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장기간 바둑 황제 이창호로서의 세계 바둑 군림은 오로지 조훈현의 위대한 가르침 탓이라고 생각해야 맞고, 아무리 겸손하게 말하더라도 자신이 커다란 뭔가 하나는 가르쳤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조훈현은 한번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 10대 초중반부터 이창호의 바둑 색깔은 조훈현과 많이 달랐다. 단지 조훈현 입장에서는 어린 이창호에게 자신이 주려 한 색깔과 입단 후 이창호의 혁명적 바둑 패러다임의 방향이 달라서 아쉬웠던 것뿐이지, 예나 지금이나 이창호가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번뜩이는 수와 같이 묘수를 잘 두는 사람을 천재로 보는 사람들은 이창호가 인내의 천재, 노력의 천재이지만, 말 그대로의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조훈현도 말했다시피 이창호의 천재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 조훈현 같은 사람도 몰라 봤는데 일반인이 알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이창호의 천재성을 느끼려면 이창호와 대국을 해봐야 안다는 말도 있다. 바둑 전문가 10명 중 7명이 이창호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점, 15세도 채 안된 어린 나이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세계 정상에 군림한 점을 보면 천재가 아니라고 하는 게 더 어렵다.

 

사고 방식도 애늙은이 수준으로 노련했다. 즉, 전문가들도 깜빡 속을 선천적인 실력을 감추는 타고난 천재. 이창호 특유의 결이 다른 천재성은 그가 두는 묘수에서도 그 일면이 보이는데,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묘수들이 생각도 하지 못한 곳에 두어져서 국면을 바꾸고 우위의 격차를 크게 만드는 수 등의 성격으로 중반 전투, 사활 상황에서 발생하는 묘수라면, 이창호의 묘수는 이미 알고 있는 수이지만 대체로 좋지 않은 수라서 무의식적으로 배제되는데 두어지고 보니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가치가 있는 '그 상황에서만 좋은 의미를 갖게 되는 수'이거나 이미 정리가 거의 다 됐다고 생각된 판에서 미세한 수순의 차이로 미세한 이득을 얻어내서 결과적으로 마지막에 미세하지만 역전을 만들어내는 등의 수순의 묘수, 끝내기의 묘수가 많다.

 

이런 묘수에 당하는 상대편 쪽은 바둑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정도 자기 두고 싶은대로 만족스럽게 다 두고 판도 다 끝난 마당이고 계가 역시 본인의 계산으로는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종반 50수 가량에 묘수를 맞아 바둑은 역전이 되고 정작 자신이 재역전을 노리려고 해도 둘 곳 자체가 없는 그런 결말로 패배하게 된다. 묘수 3번 두면 진다는 바둑 격언을 떠올려보면 더 무서운 묘수인 셈.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 1914-20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 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올해 우리 나이로 백 한 살이지만,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 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 되는 게 바둑이다.

여튼 이창호는 프로기사가 된 후에도 남들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13살의 나이에 바둑왕전 타이틀을 따냈다. 아무리 당시 한국기원의 선수층이 얇았다지만 조훈현, 서봉수 다음의 '도전 5강'(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이 10년의 도전 속에서도 단 하나의 타이틀만을 딴 것을 감안한다면 이창호의 13세 우승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989년 제18기 KBS 바둑왕전 결승국 실황. 빨간 옷이 이창호, 왼편은 김수장 七단

이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14세 때 타이틀 수를 늘리더니 15세 땐 조훈현과의 번기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한국 최고의 다관왕이 된다. 프로기사로 입단해도 빠르다는 소릴 듣는 나이에 이미 한국 프로기사의 정점에 섰으니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현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1991년 제22기 명인전의 제3국. 왼쪽이 스승 조훈현이고 오른쪽이 이창호. 이창호는 내리 3판을 이겨 스승을 꺾어버렸다. 조 국수가 심란한지 기이한 자세로 앉아서 긁적인다. 조 국수 뒤의 안경을 쓴 분이 대한민국 유일의 대국수인 조남철.

이창호가 스승의 타이틀을 계속 빼앗아 오면서 집에 오면서 어색한 시간이 늘어갔다. 조훈현 九단의 부인 정미화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창호가 밤 늦게까지 복기를 하고 있을 때 창호 방에서 돌을 두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남편을 꺾기 위한 것인가'란 생각과 함께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고 한다. 더불어 승리한 제자와 패배한 남편을 한 차에 태우고 오는 날에는 만감이 엇갈렸다고 한다. 사실상 남편의 내제자라는 건 부인 입장에서 자식이랑 비슷한 것이었다. 실제로 정미화 여사는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입가 후 혼자 씻지도 못하던 이창호를 한동안 매일 같이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아들처럼 키웠다고 한다. 그런 입장에서 몇 년 만에 급격한 성장으로 자기 남편을 이기고 우승을 하기도 했으니 기분이 섭섭하며 착잡했을 수 있다. 이창호 또한 조훈현 내외를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창호의 결혼식 때 확인할 수 있다.[19] 결국 조훈현 평창동으로 이사를 할 때 분가하게 된다.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보통 천재는 반짝반짝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 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 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 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 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한국 바둑의 정점에 서자 일본에서는 '일본기원과 바꾸더라도 이창호를 사고 싶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소년 이창호에 대해 일본 기사들은 강한 호기심을 가졌고, 공교롭게도 린하이펑이라는 거물급 기사와 세계대회(제3회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하는데, 이 커다란 승부에서 이창호가 승리했다.(3:2)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강 기사였던 조치훈 九단은 이창호와의 동양증권배 5번기 결승을 앞두고 조훈현에게 "제자한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 것 아닌가? 그래 가지고서 뭘 배우겠는가."라고 말했는데 "그럼 한번 둬 봐."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뒤 벌어진 번기에서 초반은 조치훈이 좋았으나 중후반 이창호의 추격에 2, 3국을 반집으로 내주면서 0-3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창호는 누구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이다.

그 뒤 기복 없이 꾸준히 성적을 내 당시 절대 본좌였던 스승인 조훈현을 결국 무관으로 만들어 버리고 1994년에 13관왕을 하는 등 독주하였다. 이런 독주는 그야말로 우악스러울 정도였고, 기간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15년이 약간 안 될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이창호는 승률왕을 독식하였으며 일 년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한 80%대의 승률을 수 차례에 걸쳐 달성했다. 이창호 평생 승률이 73%이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전설인 셈.

통산 레이팅으로만 보면 1995년 8월 말이 최전성기이다.

1996년 6월에 七단에서 九단으로 한국 바둑 사상 최초로 한번에 2단을 특별 승단했다. 이세돌은 승단대회를 거부하여 국제 바둑 기전 우승 시 점프 승단 규정을 만들어냈지만, 이창호는 이런 규정이 아예 없는 상태에서 특별 승단을 했다. 참고로 당시 유창혁 七단도 九단으로 같이 특별 승단 되었다.

우승 역시 통산 138번의 우승, 조훈현의 157번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국제대회 우승을 한 기사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는 국내에서와 달리 국제대회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창호의 사실상 첫 세계 무대 데뷔였던 요다 노리모토의 특별대국을 참관한 오오다케 히데오는 '이창호의 바둑은 분명 강하지만 스승 조훈현을 이기는 데 너무 특화되어 있다.'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동생인 이영호의 말에 따르면 보통 식사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기름기가 많은 중국 요리를 먹고 나면 반드시라 할 만큼 탈이 났다고 한다. 초기에는 아예 굶기도 했으며 라면이나 김치를 챙겨 가기도 했다. 중국어에 능통한 이영호가 중국에서 열리는 경기의 매니저를 자청한 이후부터는 대회장 주변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일식집 등을 수소문해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창호가 해외 경험을 쌓자(그래봤자 20대 초반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승률을 과시하며 세계 바둑계를 학살했다. 딱 한번 1999년 1회 춘란배 결승에서 조훈현에게 패했을 뿐이다. 즉 결승에만 오르기만 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인 셈. 1990년대 중국 최강의 기사였으며, '이창호 빼고는 다 이겼던' 마샤오춘 九단을 만날 때마다 안드로메다로 보내 결국 재기 불능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이나 중국은 스승 조훈현은 물론 서천왕(天王)으로 불리며 중국 킬러로 군림하던 서봉수 九단 역시 벅찬데 더 괴물이 나타났으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거의 신으로 모실 정도이다. "그에게 지는 것은 한국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보다 위대함을 알려줄 뿐"이라고 할 정도니. 심지어 자신이 외계인도, 터미네이터도 아니라고 직접 해명까지 하였다!

 

한 중국 네티즌은 '우리는 국가 대항전에서 중국이 이기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지만 이창호가 지는 광경 또한 보고 싶지 않다.'라는 표현으로 이창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이 표현이 나온 시합에서 이창호는 혼자 중국과 일본의 대표 다섯 명을 연달아 박살내면서 한국팀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전성기 때는 수많은 전설을 일구었다. 우승률(1등을 한 기전 수 / 출전한 기전 수)을 퍼센트로 기록했다거나. 이창호의 전성기에 국내기전 우승률은 80%를 상회했고 국제기전도 엄청났다. 국제기전은 1996~99 우승률이 20회 중 10회로 50%, 메이저는 16회 중 9회로 56.3%라는 충격과 공포. 1년이 아닌 5년간 우승률이 저 정도 수치면 그야말로 괴수 그 자체. 1998년에는 당해에 있었던 메이저 국제바둑기전 삼성화재배, LG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를 싹쓸이 독식했다. 다만 결승전만 1999년에 치른 1998년 춘란배에서 조훈현 九단한테 2-1로 지면서 1998년 대회 전관왕 칭호를 따지는 못했다.

또한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과 함께 중일 슈퍼대항전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바둑 올림픽이라는 응씨배를 넷이서 초대부터 4대 대회까지 12년간 쓸어담았으니까. 특히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이창호다. 국제기전 절반을 우승하는 기사를 빼놓고 '슈퍼대항전'을 칭함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바둑계를 주름잡는 이세돌, 구리, 쿵제가 20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세계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한 것은 이창호의 노화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세 기사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적수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창호가 건재했을 땐 이들마저 이창호보단 약했다는 것. 사실 많은 기사들이 20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맞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세계 바둑을 나눠먹는 것은 이창호의 노쇠 덕을 본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현재 구리, 쿵제에 이어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했던 이세돌은 1990년대 후반기인 17세 때부터 '낌새'를 나타냈지만 이창호에 밀려 1인자가 되진 못했고, 이창호가 노화로 인해 기량이 쇠퇴한 뒤부터 비로소 제대로 두각을 드러내었음을 보면, 전성시 이창호의 기량은 최정상급의 한 수 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세돌과 이창호의 상대 전적도 이창호가 아직 앞서며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번기 대결에서도 이창호가 7승 3패로 우위라는 점은 이창호가 그만큼 강했다는 얘기. 단지 현재 바둑계의 추세상 대부분 기전이 속기인데다 이창호의 강점인 정밀한 끝내기가 눈에 띄게 약해진 점을 감안한다면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성적을 내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이창호와 비슷한 또래인 기사들은 한중일 통틀어 모두 한물간 것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이창호니까 한국 랭킹 2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스승의 업적들을 거의 물려받긴 했지만 단 두 가지 물려받지 못한 기록이 있다. 첫째는 전관왕, 둘째로는 연속 타이틀 홀딩 기록. 1994년 왕위전 타이틀을 유창혁이 방어하면서 조훈현이 이룩한 전관왕 타이틀은 아직 그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때의 아쉬움 때문인지 그 이후로 왕위전 만큼은 한 번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왔다. 때문에 단일 기전 연속 우승 기록이 현재 12연패. 이 기록은 조훈현의 패왕전 16연패 다음의 기록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왕위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창호의 기록이 다시 한 번 스승을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이창호에게도 천적은 있다. 바로 일본 요다 노리모토. 상대 전적이 좋지 않다.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이창호 본인이 인정한 바 있다. 첫 단추를 잘못 채운 탓인지, 이후 이창호는 요다만 만나면 이상하게 바둑이 꼬이곤 했다. 한때 상대 전적 1승 6패를 기록하는 등 계속 헤매다가 2000년대 들어서 상당히 만회해 둘 간 승률이 거의 대등해졌다. 그리고 8:8 상태에서 제7회 농심배 최종국에서 만났고 이제는 명실상부 우위로 올라서나 했는데, 그만 패배. 요다는 여전히 만만찮았다. 동률까지 갔지만 다시 패배하면서, 8승 10패로 다소 열세였다가 2연승을 하며 10승 10패로 맞췄다.

 

요다 九단에 따르면 2000국이 넘어가는 이창호 九단의 바둑을 대부분 복기해 봤다고 한다. 요다 九단에게 지고 나서는 한때 중국의 마샤오춘 九단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역전한다. 2000년대 후반에 와서는 강동윤에게 맥을 못 추고 있다.

2005년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항 연승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당시 개인 기록이 꽤 부진한 시기였던데다가 한국팀의 나머지 인원이 일찌감치 충격적인 광탈을 해 버린 나머지 한국팀에는 이창호 혼자만이, 중국과 일본팀에는 합이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에서는 혼자 남은 이창호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고 우승컵을 한국팀에 가져다 줄 확률을 3% 미만으로 계산하기도 했을 정도. 오죽하면 당시 한국팀 단장인 김인 九단이 "우승은 역시 어려울 것 같다"는 인터뷰를 했겠는가… 그런데 혼자 남은 이창호가 정말로 나머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 버리고 우승컵을 한국팀에게 가져다 주고 말았다!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자세한 요약. 상하이 대첩 문서 참고. 이 사건 이후 창하오 9단은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 때부터 시작이다." 하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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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 상하이 대첩, 제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농심배 우승을 결정짓고 나서 이창호 九단이 우승컵을 받은 장면. 바둑계의 전설적인 리버스 스윕, 상하이 대첩이 있었던 대회. 제6회 농심신라면배 대회. 2004년 10월 12일 개최되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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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 상하이 대첩


하지만, 상하이 대첩 이후부터 이창호의 부진이 꽤 길다. 무엇보다 전세계가 이창호의 바둑을 연구하기 시작하니 결국 중국의 구리 등의 기사나 한국의 최철한 등이 강력한 전투력을 앞세워 이창호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이창호 이후 끝내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현재는 신예 기사들의 끝내기 실력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것도 이유일 것이다. 또한 실수를 적게 하는 것을 모토로 삼는 그가 실수가 잦아지고 끝내기에서 미스가 속출하면서 예전처럼 둘 수 없는 이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제 13회 LG배에서 우승한 구리에게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질문하자 이런저런 말을 하고 말미에 "이창호에 비하면 이세돌과 나는 아직 멀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휴직하기 전 명실상부 국내, 세계 1인자였던 이세돌은 이제 그만 1인자임을 인정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 국수에게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두 차례 이상 답했다. 이창호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2010년 1월 16일 제2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64강전에서 17세의 연구생에게 패배, 탈락했다.#관련기사 그냥 진 것도 아니고 100수도 못 채우고 불계패했다.

2010년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혼자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류싱, 구리, 창하오를 꺾으며 3연승, 한국의 8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2010년 11월 한국 랭킹이 6위까지 떨어지고, 승률도 60%가 안 나왔다. 입단한 이래 최악의 성적. 이 때문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 멤버가 되었으면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11월 23일 광저우 기원에서 열린 남자 단체전 예선리그 2라운드에서 한국 남자팀의 승리에 일조, 특히 또 하나의 '이창호 킬러'로 불릴 정도로 근래 상대 전적이 우세하던 창하오 九단을 다시금 제압하여 역시 이창호다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5일 일본과의 대국에서는 이세돌과 함께 지는 바람에 대표팀은 최철한을 비롯해 나머지 3인이 분발하여 승리, 간신히 결승에 올라갔다. 26일 단체전 결승전에서 제1장으로 나서 중국 랭킹 3위 구리를 관광보내며,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오전 예선 6R에서 패해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점심 먹고 와서… 구리 역시 이창호 못지 않게 부진을 겪고 있긴 하지만, 대국의 내용은 전성기의 이창호 바둑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중계 해설의 평.

바둑 팬들은 부진한 때에도 진로배, 농심신라면배 등 단체전에서는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2010년 제11회 대회 포함 농심신라면배 성적 19승 3패, 승률 86%) 이창호가 믿음을 깨지 않고, 이번에도 활약을 해줘서 '역시 이창호…'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011년 2월 14일 최철한 九단에게 패배하며 데뷔 이후 첫 무관.

2013년 1월 7일 랭킹 1위 이세돌, 떠오르는 신성 박정환을 연파하며 KBS 바둑왕전 결승에 진출했다. 만약 우승한다면 2010년 국수전 이후 3년여 만에 우승컵을 추가하는 것.

2013년 2월 1일 패자조 결승에서 이세돌 九단을 격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박정환 九단과 결승전을 치뤄 결승 1국에서 승리했으나 2월 2일 2국과 2월 4일 열린 최종 3국에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번 패배로 박정환 九단과의 전적은 6승 10패가 되었고 랭킹도 14위까지 떨어졌다.

2013년 4월 6일에 열린 제9회 한국물가정보배 예선 2회차에서부터 5월 6일에 벌어진 제18회 박카스배 천원전 예선 3회차까지 12연승을 달렸다. 랭킹도 10위권에 재진입.

2013년 7월 16일 벌어진 제1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대표 선출을 위한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에선 이세돌 九단도 탈락해 많은 이들이 이변이라고 할 정도.


2014년부터 들이 커가면서 이창호 九단의 활동이 크게 줄었다. 2016년 현재 아직 한국기원에 현역 프로기사로 등재되어 있긴 하지만 시니어급 대회말고는 기전 출전도 크게 줄어 이제는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상황.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말 그대로 '평범한 가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1국 때 이세돌 九단을 응원하기 위해 잠깐 나왔었고, 2016년 3월 25일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 바둑계 오찬 행사에도 유창혁 九단, 이세돌 九단 등과 함께 배석하기는 했다. 하지만 따로 언급은 않고 그냥 들러리 서는 수준.


그런데 2016년 갑자기 한국바둑리그에 정관장 팀 김영삼 감독에 의해 2지명(부장)으로 지명받아 바둑 현업에 복귀하게 되었다.[42] 김영삼 9단의 선택이 확 깨는 이유는 정관장 팀 1지명(대장)이 신진서 5단(최연소 주장, 만 16세)인 데다가 2지명을 한동안 바둑계에서 떠나 있던 이창호 9단을 지명했기 때문이다. 2016 한국바둑리그 화제의 팀이 될 듯.

조훈현과 분가한 이후에도 한동안 종로구 - 성북구 쪽에 살다가 2010년대 들어서 딸들 교육 문제로 강남구로 이사가서 살고 있다. 가끔씩 한국기원(상왕십리역)에 나타나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방문 이후에 건대입구역이나 노량진역 근처의 오락실에 출몰한다. 전성기 시절에도 외국에 나가서도 오락실을 자주 갔다고 한다.

 

2016년 한국바둑리그에 나왔는데 리그를 씹어먹었다. 8월 2일 현재 정관장팀 주장인 신진서 6단이 8전 전승을 기록했는데 40세를 넘은 이창호 9단이 6승 2패를 달렸다. 정관장팀을 뽑은 김영삼 九단이 보고 놀라고 있는 수준이다. 5지명으로 정관장팀에 턱걸이 입성한 박진솔 5단도 6승 2패로 리그를 씹어먹는 중. 신진서(주장) - 이창호(2지명) - 박진솔(5지명) 3명이 20승을 합작했는데 정관장팀 총 개인 승수가 25승이다. 이 세 명이 리그를 나란히 씹어먹다보니 8라운드 중에서 정관장팀이 무려 7승 1패로 단독 선두 질주 중.

이후 후반기에 체력과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는지 이전과 같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부진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8승 8패. 포스트시즌에서도 승리 없이 2패를 기록했다.


2018년 초에 한국바둑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진리배 한중바둑리그 대항전에 출전했다. 정관장황진단팀 vs 중신 베이징팀의 대항전. 이창호는 정관장황진단팀 소속이었다. 1월 19일 1차전에서 중신 베이징팀의 급격히 잘나가는 신예 한이저우 七단을 장고판에서 꺾더니, 1월 20일에는 LG배 우승 경력까지 있는 주장급 선수 퉈자시 九단을, 그것도 속기에서 꺾어서 충격을 주었다. 이창호가 한이저우-퉈자시를 나란히 꺾어버린 것을 두고 한국 바둑계보다 중국 바둑계가 더 난리가 났을 정도였다.

9월 21일 간만에 세계대회 본선 출전... 와일드카드로 나간 천부배 A조 16강전에서 셰얼하오에게 지며 바로 탈락했다.

2019년 8월 3일 국수산맥배 세계 부문에 와일드카드로 나섰지만, 16강전에서 천야오예에게 패했다.

2020년 8월 제25회 삼성화재배 월드 바둑 마스터스에서 시니어조(!)로 데뷔하였다. 예선 1회전에서 천풍조 九단을 상대로 흑 13집반승, 2회전에서 한상열 六단, 3회전에서 김영삼 九단, 예선 준결승전에서 서봉수 九단, 그리고 예선 결승전에서 최규병 九단을 흑 1집반으로 승리하고 본선 진출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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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별명, 여가, 이창호 여담. 이창호 생활

별명은 강태공, 신산, 돌부처. 중국의 언론에서는 '大李(큰 '이'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작은 '이' 씨, 小李는 이세돌 九단이다). 다른 손잡이이다. 원래는 왼손잡이지만 조훈현 九단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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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신 - 이창호의 명언. 부득탐승. 순류와 역류. 노력과 재능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사람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 그것은 인품과 무관하다. 승부사에게 패배의 아픔은 항상 생생한 날 것이어야 한다. 늘 승자가 될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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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 기풍과 묘수

이창호의 바둑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자면 두터움, 침착함, 형세판단, 끝내기다. 강태공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느려 보이나 두터운 행마를 주무기로 삼았다. 스승인 조훈현이 쾌속행마로 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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