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배 우승을 결정짓고 나서 이창호 九단이 우승컵을 받은 장면.
바둑계의 전설적인 리버스 스윕, 상하이 대첩이 있었던 대회.
제6회 농심신라면배 대회. 2004년 10월 12일 개최되어 2005년 2월 26일 14국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이창호 九단의 5연승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이 우승하였다. 이창호 九단을 제외한 한국 기사들이 전부 탈락한 상태에서, 이창호 九단이 극적으로 5연승을 거둬 한국이 대역전, 우승하여 일명 '상하이 대첩'으로 불린다.
상대한 기사들은 중국 대표 3명, 일본 대표 2명이었으나 모두 (대만인을 포함한) 중국인들이었다.
참가선수
단수는 출전당시 기준.
대국 진행 사항(왼쪽 흑, 오른쪽 백)
제1라운드(1~4국)
제2라운드(5~10국)
제3라운드(11~14국)
최종 결과
"다른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 때부터 시작이다." - 창하오 9단
이창호의 기적과 같은 승리로 보통 이 대회를 상하이 대첩이라고 부른다. 이창호는 이전 대회에서 불패의 신화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6회 대회에 출전할 당시에는 컨디션에 문제가 많았다. 일단 이창호는 이 대회의 선발전에서 탈락해서 와일드 카드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바로 전에 있던 LG배 4강에서 중국의 위빈 九단에게 덜미를 잡혔고, 국수전에서도 최철한에 0:3으로 패배하는 등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한국팀과 이창호를 응원하던 한국 팬들조차 이창호의 승리에 확신을 가질 수 없던 상황이었다. 이창호는 이세돌 九단에게 밀려서 타이틀을 계속 상실하고 있었고, 점차 1인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하향세였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두고 당시 중국 및 일본 언론에서는 "이창호가 이겨서 한국이 우승할 확률은 3%도 안 된다."는 식으로 대놓고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대표적으로 환구시보. 그러나 전성기 이창호 九단에 죽어라고 얻어맞았던 마샤오춘 九단은 "나는 언론 보도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1:2 베팅을 해도 나는 이창호 5연승에 모든 걸 걸겠다."고 한 바 있다.
이후 이창호는 10국에서 뤄시허 九단에게 이기고,[10] 11국에서 장쉬를 꺾더니 폭주기관차처럼 상대 기사들을 이겨가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왕씨 성 돌림인 왕레이, 왕밍완, 왕시를 내리 꺾고 5연승을 달성하여 우승컵을 한국에 가지고 왔다.
기타
이 대회에서 발굴된 명짤인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밝은 얼굴로 여유롭게 입장하는 중국 기사들과 달리 홀로 걸어가면서 외로운 투쟁을 벌이는 듯한 이창호의 모습이 압권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창호가 보란 듯이 전부 물리쳤으니, 이창호의 위용을 증명할 수 있는 짤방으로 후술할 드라마에서도 재현될 정도였다.
이 스토리는 응답하라 1988에서 최택의 에피소드로 등장하였다. 사실 최택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이창호를 그대로 모티브로 하였다. 그런데, 1988년에는 이런 방식의 국제 기전이 아예 없었다. 이 상하이 대첩은 2005년이고, 농심신라면배의 선배격인 진로배 국가대항전도 199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대회로 이창호의 5연승은 농심신라면배의 최다 연승기록으로 남게 된다. 이 기록은 훗날 강동윤이 12회서 5연승 타이기록을 세웠으며, 18회서는 판팅위의 7연승, 19회서는 신민준이 6연승으로 국내기사 기록까지 갱신당하지만, 이들같이 비교적 약체가 지목되는 초반과는 달리 하나같이 고수가 쏟아져나오는 후반부에 5연승을 달성한 점은 빛바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창호 홀로 남겨졌을 때의 중압감은 말할 것도 없고.
다음 해인 2005년~2006년 대회에서는 이창호 九단이 14국에만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는 조한승 九단의 3연승으로 무난하게 한국이 우승하나 싶었는데, 하필 이창호가 최종국에서 만난 상대가 이창호의 천적 요다 노리모토. 요다 九단이 마지막까지 내리 연승을 찍고 최종국에 이창호 九단이 나와 천적 요다 노리모토 九단이 3연승을 찍음으로서 우승컵을 일본에 주게 된다.
그리고, 이창호는 같은 2006년, 서울에서 열린 TV 바둑 아시아 선수권대회 결승국에서, 전년 마지막 대국을 했던 왕시에게 패한다. 왕시는 이 승리로 五단에서 九단으로 즉시 승단했다.
안타깝게도 그야말로 정점을 찍은 이 대회 이후, 이창호 九단의 전성기가 사실상 끝났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물론 이후로도 이창호는 여전히 30대 중반까지 세계 정상권 기사 중 한명이긴 했지만, 이전까지의 압도적 1인자에서 내려왔다고 평하는게 옳다. 다름이 아니라 이 대회 이후 이창호 九단은 나이 때문인지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 와중에 다른 기사들이 이창호에 대해 파고들며 연구한 것이 효과를 보며, 이창호의 패배가 잦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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