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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조훈현 국수 - 삶과 전성기 프로기사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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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3월 10일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회문리

창녕 조씨

A형

아내 정미화, 슬하 1남 2녀

 

서울삼선초등학교 - 신메이중학교 - 목포대학교

입단 - 1962년(한국기원) 1966년(일본기원)

우승횟수 - 160회 (한국 바둑기사 1위)

보유기록 - 세계 바둑계 최초 전관왕, 세계 최초 바둑 국제기전 그랜드슬램, 바둑기사 최다 연속우승 기록

 

1부 - 바둑기사 조훈현, 국수 조훈현 - 생애와 삶

https://gameabout.tistory.com/153

 

바둑기사 조훈현, 국수 조훈현 - 생애와 삶

대한민국의 바둑기사, 정치인이다. 한국기원 소속 프로기사 최초의 九단이다. 일명 '조국수', '쿤켄'. 한국 바둑계의 역사 중 하나로 표현되는 정상급 기사. 이창호 九단의 스승이자 일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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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군대에서 체력 등이 보강되어 더 나아진 실력으로 드디어 괴수로 등극한다. 74년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꺾고 첫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76년 하찬석 九단을 제압하고 평생의 경칭으로 불리는 국수 타이틀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당대의 강자들을 모두 쓰러뜨리더니, 80년 7월 2일에 이르러 서봉수의 명인 타이틀까지 빼앗으며 전관왕을 달성한다.

 

그러나 80년 12월에 왕위전에서 그의 착수를 똑같이 따라하는 '흉내바둑'을 구사한 서봉수에게 4:3으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이때부터 15년간 조-서 시대로 불리는 양강구도가 지속된다. 이 조-서 시대가 한참이던 82년, 한국기원 최초로 '입신'(九단의 별칭)에 오른다.

 

팬들조차 지리하게 느끼던 이 양강구도를 깨고자 덤벼든 이른바 도전 5강-장수영, 서능욱, 김수장, 강훈, 백성호-으로 불리는 신흥 기사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언제나 조훈현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도전을 격퇴했다. 박치문 기자의 말에 따르면, 도전 5강이 조-서의 양강구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은 실력차에다, 도전 5강 스스로 실력차를 인정해버리고 조훈현, 서봉수의 기보를 연구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영향이 크다고 한다. 단, 이것은 포기했다고 도전 5강을 무작정 비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봉수는 한번 물면 놔주지 않는 끈덕지고 사나운 기풍의 소유자다. 개인차가 있다고 하나 어느 정도 정형화된 싸움을 기반으로 하는 기사가 서봉수 스타일을 따라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기보를 연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장점을 강화해 대항하려는 것이 당시 도전 5강의 생각이라고 보는 쪽이 좀 더 타당하다. 특히 백성호같은 경우는 행마 자체가 '반상의 신사'라 불릴 정도로 정수만 찾아가는 범생이 스타일이라 조훈현과 서봉수한

테 집요하게 털리곤 했다.

 


결국 도전 5강은 조훈현과의 치수 고치기 이벤트전에서 정선과 두 점을 오가는 굴욕을 겪을 정도로 조훈현은커녕 그와 비슷하게 대결할 수준은 되었던 서봉수조차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들 중 타이틀을 차지한 것은 강훈의 86년 박카스배 우승이 유일하며 그것도 조훈현이 아닌 김인을 꺾고 거둔 우승이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 조-서의 승률은 2대 1 정도로 조훈현이 더 앞선다. 단지 워낙 많은 기전에서 그들 둘이 결승전을 치렀기 때문에 인식이 그렇게 돼 있던 점도 있었고, 서봉수를 제외하면 조훈현을 그 정도로 극복해낸 사람도 없었던 것도 그 이유라 하겠다.


중국 절강성 항저우에서 개최된 결승2국 포석 전개 상황이다. 1국을 이긴 데 반해 조훈현이 그만 2국을 녜웨이핑에게 내줘야 했다.

뭐니뭐니해도 조훈현의 바둑 인생 최전성기는 89년 대만의 재벌 잉창치가 주최한 세계 최고 규모의 대회인 응씨배 결승에서 중국의 별 녜웨이핑 九단을 꺾던 순간이라 할 것이다. 이 우승으로 당시 '조훈현을 제외하면 듣보잡' 취급을 받으며 응씨배 초청장도 격렬히 항의해서 간신히 조훈현 한 명만 초청받을 정도로 변방에 머무르던 한국 바둑계의 위상을 일거에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결승 최종국. 2:2 동률인 상황에서 왕위를 놓고 침묵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사진은 초반 포석 전개 상황. 이 결승국에 한중일의 수많은 기자들이 모였고, 생중계되었다. 흑은 조훈현, 백은 녜웨이핑이다.

 

이때 한국에서 20세기 최후로 국가 주도 카 퍼레이드를 한 인물이 됐고, 한국 바둑을 창시한 조남철 九단과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았다.

 

조훈현은 10년 동안 정상에 있으면서 천하에 맞설 상대가 없어보였는데,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린 사람은 바로 내제자로 맞아들였던 이창호였다. 1990년 2월 20년전에 처음 차지했던 최고위전에서 제자 이창호는 스승의 타이틀을 처음 빼앗았고, 이후 차례차례 조훈현의 타이틀은 이창호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조훈현의 시대에 처음 구멍을 낸 사람은 이창호가 아니라 유창혁이었다. 1988년 대왕전에서 유창혁(당시 3단)이 조훈현을 원사이드하게 잡고 타이틀을 뺏은 이후, 조훈현도 자기가 하향세를 탈 것을 인지했던 것. 응씨배 우승 후 "나는 할 만큼 했다 뒷 일은 창호가 알아서 해주겠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창호가 아니었다면 유창혁이 조-서 시대 이후를 리드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 유창혁은 차근차근 조훈현과 서봉수의 타이틀을 뺏어갔고, 국제기전에서도 유창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창호가 뜨면서 유창혁은 2인자로 밀렸다.


1991년 8월 20일 관철동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서 치러진 명인전 제3국. 사진기준 왼쪽이 조 국수, 오른쪽이 이창호 기사. 소파에 몸을 푹 뉘인 조 기사의 자세는 와기(臥棋)라고도 일컬어졌다. 조 국수 뒤의 앙상한 할아버지는 바둑계 최고원로이자 대국수인 조남철 九단. 그러니 후일 조 국수는 이때 상황에 대해 "열여섯 소년 이창호를 상대하느라 온몸이 분해될 지경이었다. 언론에서 점잖게 와기라고 표현해줬지만 체력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하나 봐주지 않고 이창호가 조훈현의 타이틀을 다 쓸어가던 시절이니 그 부담감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동안에도 조훈현과 이창호는 같이 지내고 있었다. 조훈현의 부인 정미화는 둘을 대국장에 함께 차로 싣고 가서는 밤에는 타이틀을 빼앗긴 남편과 그 타이틀을 빼앗은 제자를 같이 맞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 시기 신문 만평에 실린 조훈현의 2층 집에서 호랑이가 자고 있고, 그것을 조훈현이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 상황을 적절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이 상황은 91년에 조훈현이 이사를 하면서 이창호도 자연스럽게 분가하는 식으로 끝이 난다.

분야를 막론하고 보통 제자가 정상에 오르면 스승은 달이 지듯 점점 그 빛을 잃어가다 스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에 비하여, 조훈현은 한때 이창호에게 그 많은 타이틀을 다 잃어버려 대부분의 바둑팬들은 은퇴를 예상할 정도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으나, 하루 네댓갑씩 피우던 담배까지 끊어가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 결국 바둑 스타일을 일신하며 부활에 성공한다. 특히 2002년 만 50세의 나이로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를 우승했다.

 

예전까지의 바둑 스타일이 가벼운 행마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제비라는 별명이 불릴 정도였다면, 부활후 스타일은 그야말로 화력 위주의 강한 싸움을 주무기로 하는 바둑. 여기에서 붙여진 별명이 전신(戰神)이다.

2009년 3월 기준으로 국제대회 결승전 승률은 64.7%. 이창호의 62.7%보다 오히려 높다. 과연 킹왕짱. 다만 국제대회 결승전 총전적 다승 랭킹으로는 이창호에게 압도적으로 밀린다. 이창호의 경우 52승 31패, 조훈현의 경우 22승 12패이다(물론 위에 서술하였듯이 조훈현의 전성기에는 국제기전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한국 바둑이 듣보잡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출전수가 적은 원인도 있다.). 또한 전세계 최초로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한 기사이기도 하다. 1994년 후지쯔배에서 우승함으로써 당시 현존하던 세계대회인 응씨배, 후지쯔배, 동양증권배에서 모두 한 차례 이상 우승을 차지하여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그랜드 슬램이라고도 한다.)는 2002년 유창혁, 2004년 이창호가 차례로 달성하고 그 이후에는 달성한 사람이 없다. 또한 세계대회 결승에서 2차례 이상 우승했으면서도 외국 기사에게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유일한 기사이다.

 

이창호나 유창혁, 이세돌 모두 세계 정상의 일각에 있으면서도 외국 기사들에게 우승컵을 내준 적이 있지만 조훈현 九단은 세계대회 준우승 2회가 있지만 이는 모두 유창혁 九단에게 졌을 뿐 창하오, 왕레이, 녜웨이핑 등을 상대로 모두 이겼다. 심지어 제1회 춘란배에서는 이창호도 결승에서 꺾어서 이창호에게 세계대회 첫 준우승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세계1인자'에 오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창호나 이세돌과는 달리, 의견이 갈리곤 한다. '이창호의 치세', '이세돌의 치세', '구리의 치세'가 분명히 있었던 것과는 달리, 세계바둑사에 '조훈현의 치세'라고 할 만한 시기는 없었다는 것. 최초의 세계대회인 후지쯔배, 최고 규모의 세계대회인 응씨배가 생긴 것이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밀리기 시작하던 시기 직전인 데다가 4년에 한 번밖에 안 열리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즉 세계바둑에서의 순위와 패권을 논할 만한 시기가 되었을 때는 이미 이창호의 시대였다.

 

가장 큰 것은, 당시 바둑계는 일본이 압도적이었고 중국이 버겁게 쫓아가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은?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조훈현의 전성기에 일본에서는 조치훈이 가장 앞서는 기사였는데, goratings에서는 이 시기 세계 1위를 조치훈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당시 한국의 선수층은 너무 얕아 고레이팅의 기사가 없었고 국제기전도 없어 조훈현이 점수를 올리기 매우 힘들었음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1980년대 후반 후지쯔배와 응씨배가 열리기 전까지, 국제대회라고 하면 사실상 중일 슈퍼대항전이 유일했다. 1988년 1회 응씨배에 초청받은 한국기사가 왜 조훈현 딱 한 명이었겠는가. 그 조훈현이 응씨배에서 우승하면서 한국바둑이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goratings에서 나온 랭킹도 한국 기사들은 1988년 응씨배부터 반영되기 시작한다.

 

이후 goratings에 데이터가 추가되며 1986-1990 1위 기사는 조훈현으로 바뀌었다. 이쯤 되면 초대 응씨배를 위시한 시대를 조훈현의 시대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듯 하다.

 

2016년 5월 30일부터 국회의원이 됨에 따라 2016년 5월 25일 한국시니어바둑리그에서 서능욱 九단한테 이긴 것을 마지막으로 한국기원에 휴직계를 제출하고 5월 26일 바둑기사 휴직 기자회견을 가졌다. 조훈현 九단 말로는 재선 도전의 생각이 없어 2020년에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는 대로 바둑기사로 복귀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 휴직 기자회견과 서능욱 九단과의 대국을 '반상 위의 스승님' 후지사와 슈코 九단의 은퇴 기자회견과 은퇴 대국처럼 사실상 은퇴 선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자세한 건 후술하지만 조훈현 스스로가 말했듯 은퇴와는 아무 연관이 없었고, 실제로 2020년에 정계를 떠나 다시 프로기사로 복귀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MR2K08Cow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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