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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서울올림픽 1988 한국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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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캐치프레이즈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일부 수도권 지역 및 각 종목별로 주요 도시 지역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 대회의 정식 명칭은 '제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 특히 대회 운영방식면에서 대륙별 종합 스포츠 제전 이후 곧장 2년 만에 치러졌던 전무후무 유일한 올림픽이며, 그간 역사에서 아테네, 로마, 런던, 도쿄 등과 같이 여러 모종의 사정을 비롯하여 오랜 기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개최를 거두었던 유럽을 비롯한 여타 선진국 도시들과도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를정도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회로도 기록된다.

거기에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최하의 빈국으로 전락했던 대한민국이 불과 30여년 만에 한강의 기적으로 일궈낸 눈부신 발전상을 자랑하는 '국위선양'의 장이었고, 특히 올림픽의 단순한 취지 및 보통적인 의미의 범주를 벗어나 여러 국가,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되는 등 세계 역사의 흐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 안 되는 큰 의미를 지닌 대회이다.

 

마스코트

 



대회 마스코트의 이름은 호돌이. 로마자로 Hodori로 표기되었고. 동물 모티브는 당연하게도 호랑이. 그리고 당시 디자이너였던 김현의 작품이었다. 특히 이는 오로지 88년에 열릴 서울 올림픽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이로 인해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 표기를 포기했으며 마지막 폐회식에서도 후에 올림픽의 대표 마스코트가 될 호돌이를 더욱 강조했을 정도의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마스코트였다.

2008년 미국의 MSNBC 2008 베이징 올림픽 특집 방송에서는 `역대 올림픽 최고의 마스코트’를 선정했는데, 20년 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가 무려 3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당시의 시대적 혹은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오로지 외관으로만 평가한 기준으로 매겨진 순위였다.

 

 

성화 봉송

1988년 8월 23일 오전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 마당에서 채화돼 그리스 지역 봉송을 마친 후 8월 24일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 성화 인도식을 치르면서 성화가 조직위원회 측에 인계됐다. 8월 25일 아테네를 출발한 성화는 8월 27일 오전 11시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대한민국 국내 봉송을 시작했다.

 

 

제주도 일주 봉송을 마친 성화는 대형 크루즈선인 올림피아호를 통해 부산항까지 해상 봉송됐고 8월 28일부터 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올림픽 개막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당시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진 코스는 아래와 같다. 굵게 표시된 지역은 성화가 하룻밤을 묵으며 문화축제를 치렀던 곳이다.

 

https://youtu.be/KeWSC7iCnpM


다음 올림픽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개최국인 한 스페인 소피아 왕비 펠리페 왕세자가 개회식에 귀빈으로 참석했다.

 

이들을 포함해 총리급 이상의 귀빈으로 일본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 룩셈부르크 장 대공, 감비아의 바카리 다르보 부통령, 스위스의 장파스칼 델라무라즈 부통령, 말레이시아의 아즐란 샤 부국왕이 참석했다. 이외에도 나카지마 히로시 WHO 사무총장, 토머스 브래들리 미국 로스앤젤레스 시장, 그 해 미스 유니버스였던 폰닙 낙히란까녹, 태국의 티엔차이 시리삼판 부총리, 브루나이의 수프리 볼키아 왕자, 영국의 콜린 모이니헌 체육장관, 룩셈부르크의 기욤 왕자, 그리스 전 국왕 콘스탄티노스 2세, 나카지마 겐타로 일본 문부과학상, 스즈키 슌이치 도쿄도지사 등이 개회식에 참석했다. 참석인사들 중 정상급 인사라고 할만한 사람은 일본 총리 다케시타 노보루 외에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주로 각료급 인사를 파견했다.

 


올림픽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식인 개회식에 정상급 인사가 다수 불참한 것은 세계 주요국이 몰린 미주와 유럽에서 아시아는 여전히 이동거리가 먼 대륙이었던데다 이 당시만 해도 세계 사회 내에서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의 존재감이 꽤 높아졌지만 올림픽 당시만 해도 국력도 약하고 영토도 작았으며 올림픽 개최일 기준으로 몇십년 전 6.25 전쟁을 치르고 빈곤에서 겨우 벗어난 아시아의 약소국이었기에 각국 정부가 파견 인사의 급을 낮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올림픽 이후 대한민국의 위상이 수직상승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30년 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경우 정상급 인사들이 다수 참석하였다.

개회식 당시 장내 아나운서에는 KBS에서 재직했던 원종관 아나운서가 한국어 장내방송을 맡았다. 원종관 아나운서 외에 여성 아나운서 2명이 올림픽 공식 언어인 프랑스어 영어 장내방송을 진행했다.

 

 

역대 올림픽 사상 최초로 주경기장 밖에서 개회식이 시작되었다. 한강에서 열린 '강상제'는 세계인들이 강을 통해서 잠실로 모이고 있음을 연출한 것으로, 전통민요를 배경음악으로 수상스키와 연날리기 등을 선보였다. 다음으로 주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거대한 풍선으로 장식된 세계수가 우뚝 서서 관중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주경기장에서는 길놀이를 통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터씻기'를 행한다.

 

이후 강상제에서 운송되었던 거대한 용고가 조선 왕조의 군악대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으로 입장한다. 세계수 앞에서 해맞이를 위해 용고를 치자, 거대한 풍선들이 하늘로 떠올라 세계수는 해체되고 성화대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성화대가 모습을 드러낸 후, 한국의 선녀들과 그리스의 여신들이 만나서 동서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무용 '천지인'을 선보인다.

 

다음으로는 대규모 매스게임을 선보였다. 매스게임에는 서울시내 실업계 고등학교(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외) 학생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이처럼 개회식 예행연습을 위해 강제로 1년여간 단축수업을 받고 또한 방학 때 보충수업을 받는 등,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굉장히 큰 문제로 대두되었을 부분도 있지만, 당시 교육현장 자체가 권위주의 일변도인 데다 국가적으로 워낙 거국적인 행사였기에 말이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 개/폐회식 준비 때도 비슷한 문제가 제기됐다.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88', 'Welcome'의 큰 글자 모양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연출한다.

 

사실 이런 학생 동원은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전국체전을 개최하는 도시마다 이런 중고교생 동원 행사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심심하면 동원되던 김일성 때려잡자(반공 대회)도 있었고. 참고로 한국은 민주화가 되고 이런 군중동원 체제가 사라졌지만 북한은 아직도 현역이다(....) 그래서 혹자는 통일 후 북한에 가장 빠르게 보급될 프로스포츠로 축구를 꼽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군중동원에 쓰는 경기장들이 도시마다 5만 명 정도는 우습게 수용할 정도로 여기저기 건설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식행사

올림픽 팡파레가 울리자, 주최국 대한민국의 국가원수인 대통령 노태우와 그의 여사 김옥숙이 박수갈채와 함께 귀빈석에 입장하여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 여담에 따르면 노태우는 대통령과 영부인을 겸직한 것으로 소개된다.

물론 진행상의 실수였다.) 'Welcome'의 모양을 만들었던 학생들은 '어서오세요', 올림픽 오륜마크, 서울올림픽 공식 휘장의 순서로 모양을 바꾸며 놀라운 매스게임을 선보였다. 이후 올림픽 기수단을 선두로 선수단이 입장했다.

 

개회식 입장은 한글 가나다 순대로 진행되었으며, 그에 따라 가나가 2번째, 영국령 홍콩이 159번째로 입장했다. 다만, 국가 간의 관계 및 사정에 따라 순서가 뒤죽박죽 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란의 경우 원래 입장순서가 이라크 다음으로 배정되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영향으로의 견원지간으로 인해 몇 나라 뒤로 순서를 미루기도 했다. 

 

한국은 개최국은 마지막에 입장한다는 전통에 따라 맨 마지막에 입장했다. 70년대까지는 열병식처럼 대열로 줄맞춰 다소 경직된 분위기로 입장했으나, 몬트리올 올림픽을 기점으로 손을 흔들고, 국기를 흔드는 등 자연스럽게 입장하기 시작했다. 다만 개회식 영상을 보면 선수단 입장 시 동선이 잘 정리되지 않은 탓인지, 몇몇 국가의 선수들은 잠깐씩 멈춰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수단이 모두 입장한 후, 박세직 조직위원장의 개회사와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도중에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는데, 사마란치 위원장의 말이 다 끝난 줄로만 알고 아나운서가 대통령의 개회선언이 있을 것이라며 안내방송을 내보낸다.

 

이 탓에 사마란치 위원장이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도중 말이 끊기고 만다. 당황스러웠겠지만, 사마란치 위원장은 대통령에게 개회선언을 부탁하는 말까지 마무리한다. 마지막으로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를 한국어 발음으로 외쳤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이 개회를 선언했다.

 

''나는 제24회 근대올림픽대회를 경축하면서, 서울올림픽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선언합니다.''


노태우 대통령

 


개회 선언 후 올림픽 팡파르가 울려퍼지고 관중들의 카드섹션이 이어졌다. 카드섹션의 내용은 평화(harmony). 이어서 취타대가 선두로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8명의 메달리스트들이 오륜기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왔다. 이후 올림픽 찬가가 울려퍼지며 오륜기가 깃대에 게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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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전투기가 하늘 상공에 오륜기를 그리고 성화 음악과 함께 남문으로부터 최종 성화 봉송주자가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해프닝이 있었다. 바로 올림픽 최종 성화 점화주자가 마지막에 바뀐 점인데, 원래 누구가 다 예상하는 것처럼 손기정이 점화할 것으로 보였지만, 너무 뻔하고 드러났기 때문에 정부에서 막판 방침을 바꾸게 된다. 손기정은 최종 성화 봉송주자가 되었다. 정확히는 끝에서 2번째다.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으로 들어온 후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였던 중거리 육상선수 임춘애에게 넘겼다.

 

그리고 임춘애가 트랙을 잠시 돌다가 점화자에게 넘긴 것. 그리고 성화 점화자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표어였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에 맞춰 평범한 시민들이 점화하게 되었다. 바로 건국대학교에 재학중이던 마라토너 김원탁, 섬마을 학교 체육 선생님이던 정선만과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 재학생이던 손미정이다. 올림픽의 관례였던 성화 최종주자가 성화를 점화하는 것을 처음으로 깨뜨린 대회다. 이때 최종 성화 봉송주자였던 손기정 옹이 정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면서 펄쩍펄쩍 뛰며 성화봉송을 했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

 

 

올림픽 사상 최초로 계단이 아닌 방식(엘리베이터)으로 성화대를 점화한 올림픽이다. 이전부터 그리고 당시로서는 최근이었던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까지도 거의 대륙별 스포츠 권위 대회에서 사실상 성화대 옆에 계단이 놓여져 있었고 이를 올라가 불을 붙이는 방식이었으나, 서울 올림픽 때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도입한 후 새로운 점화 방식을 고안하는 것이 개회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가 되는 전통이 생겼다.


개회식 기획자 이어령에 따르면 실은 그건 현대 문명의 기계식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보이지 않게 피아노줄과 도르래를 이용해서 두레박처럼 끌어올린 것이다.

 


성화 점화 후 농구 대표선수 허재와 핸드볼 대표선수 손미나가 선수대표로서, 이학래가 심판대표로서 선서를 진행한다. 선서 후 공식행사의 최종 순서로 주최국 대한민국의 국가인 애국가가 장내에 연주되었다. 이렇게 공식행사는 마무리되고, 식후공연의 진행을 위해 선수단들은 모두 퇴장했다.

식후공연

식후공연은 육군 공수특전여단 22명의 고공강하 스카이다이빙 쇼로 막을 열었다. 이어 세계 최정상급 스카이 다이버, 비.제이. 워스*를 리더로 전세계에서 모인 30여명의 국제스카이다이빙연맹 소속 챔피언들이 팀이 선을 보였다. 이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낙하하며 오륜마크를 만드는 연습과 착지연습을 한 뒤* 한강 고수부지에서 둘레 840미터의 주경기장 안에 정확히 착지하는 과정을 한달 동안 리허설을 했다.

 

잠실 상공 4,000미터 상공의 치누크 헬기 2대에서 자유낙하 한 30여명의 세계 최정상의 스카이다이빙 곡예팀이 공중에서 오륜마크를 그리는 모습을 헐리우드 영화 폭풍 속으로, 고공침투 등을 촬영한 탐 샌더스, 노먼 켄트 등 3인조로 이루어진 전문 스카이다이버 촬영팀이 주경기장 전광판과 전세계에 위성 TV로 생중계하였다. 이들 모두가 올림픽 경기장 안으로 정확하게 열을 그리며 착지하여 전세계 시청자들과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스카이다이버들이 강하하는 순간 애국가가 울려퍼지며 경기장에는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이 울려퍼진다. 한복을 입은 800여명의의 영등포 여상 학생들이 축제 때 치는 거대한 차일을 들고 나와 춤추며 흔듦으로써 지상에사 다시 한번 오륜 마크를 연출한 스카이 다이버들을 환영했다.

 

이후 조선 왕조의 궁중무용인 화관무를 선보여 태평성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태평성대가 지나면 혼돈이 오기 마련이다. 다음 공연 '혼돈'은 무용수들이 각국의 민속 가면을 들고 나와 어지러운 군무를 추어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출한다. 마지막에는 거대한 한국의 전통 가면들이 개회식장 지붕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혼란이 종식되고 우리 사이의 벽을 허물기 위해 수많은 태권도 군단이 한국의 전통 무술인 태권도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벽을 허문 뒤, 어느 어린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으로 입장한다. 개회식에서 가장 인상 깊던 장면으로 뽑히는, 이른바 "굴렁쇠 소년"이다. 행사 도중 윤태웅이라는 7세 소년(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 홀로 굴렁쇠를 굴리며 주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퍼포먼스였다. 약 2분 동안 경기장에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경기장 한 가운데로 굴렁쇠를 굴리면서 등장한 소년이 관중에게 손을 흔든 이 퍼포먼스는 강한 인상을 남기며, 오늘날까지도 서울 올림픽의 상징으로 남았다.

 

전쟁 이미지가 강했던 한국에 평화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동서 진영의 화합과 평화를 소망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이라고 한다. 기획한 사람은 당시 올림픽 개회식 준비에 참여하던 이어령. 올림픽이 끝난 후 문화부 장관으로 영전한다.

 

 

 


16년 뒤에 열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에서 스타디움 바닥이 에게 해(海)를 상징하는 호수로 변하며 한 소년이 홀로 대형 종이배를 타고 물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연출하여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는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감독을 지낸 예술가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에 의하면, 아테네 올림픽의 개회식 연출을 위해 과거 여러 올림픽의 개회식을 참고하던 도중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회식 장면에서 어린 소년이 혼자 굴렁쇠를 굴리며 그라운드를 가로지르던 순간이 자신에게 특별한 감명을 주어 아테네 올림픽에서 어린 소년이 종이배 모양의 보트를 타고 물을 가르지르던 장면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굴렁쇠 소년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등장한 다섯 아이들의 모티브가 된다.

굴렁쇠 다음에 나오는 '새싹'(바람개비)은 잠실종합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서울삼전초등학교의 두 학년이 맡은 것이다. 다음으로는 우리의 민속놀이 중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고싸움놀이'를 선보였다. 승패를 가르는 대신, 모두의 협동을 통한 화합을 보여준다. 고싸움놀이는 2년 전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데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막식 모두 광주 칠석동 고싸움놀이 보존회가 시연을 준비했다.

 


마지막 순서였던 한마당에서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손에 손 잡고 코리아나가 열창했는데,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자국의 의상을 입고 한데 어우러진 것은 물론이고 역대 올림픽 마스코트, 개회식 전출연자들까지 총집합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특히 뮌헨 참사가 일어난 비극적인 대회의 마스코트인 발디, 보이콧으로 얼룩졌던 직전 3개 대회의 마스코트인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의 아미크,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의 미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의 샘 그리고 호돌이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가히 최고의 퍼포먼스라는 말 외에는 다른 수식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

 

https://youtu.be/dFdIezJz6Vk


개회식 폐식통고가 끝난 후 그라운드에 모인 개회식 출연자들이 관중들의 퇴장하는 동안 박수를 치며 동요 고향의 봄을 불렀고 경기장 밖 한강 둔치에서는 폭죽이 터지면서 올림픽 개막을 자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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